에세이와 소설류를 주로 보는 내가 창피했던 시기가 있었다. 자기계발서를 봐야만 책 좀 볼 줄 아는 지성인이 아닐까, 잘못된 생각을 했었다.
내게 자기계발서는 미지의 영역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분야에는 아직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건 내가 책을 보는 이유와도 밀접하게 닿아있는데, 현재의 나는 마음이 쉬고 싶어서 책을 펼치는데 자기계발서는 나를 꾸짖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심하게 질책하며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까지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탓에 부담스럽고 어렵기만 한 것이다.
물론 자기계발서라 명명되는 책들에는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지만 공감과 위로, 토닥임이 필요한 지금의 내겐 코로나19가 성행했을 때처럼 거리 두기를 하게 된다. 가까워지고 싶지만, 지금 말고, 언젠가는 친해지고 싶은 대상이 바로 자기계발서다.
자기계발서를 즐겨보는 지인들이 있다. 어떤 이는 오프라인 서점에서 주기적으로 자기계발서를 구입하고, 또 어떤 이는 자기계발서를 보며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성인 같은 말을 한다. 내가 자기계발서에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일까, 그들이 대단해 보였다. 나도 자기계발서를 보면 더 나은 삶을 살게 될까? 저들처럼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싶었다. 언젠가는 친해질 수 있겠지 생각했던 자기계발서는 어느 순간 동경의 대상이 됐다.
자기계발서 분야에서 높은 순위에 올라 있는 책을 들였다. 뒷 표지를 덮을 때엔 나도 새로운 내가 될 수 있겠지! 조금 더 잘 살 수 있겠지! 의지가 타올랐다. 하지만 의지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50쪽을 넘기기가 힘들었으니까. 어떤 문장들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여러 번씩 반복해서 봐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속도가 붙지 못했고, 이내 흥미가 떨어졌다.
결국 내 얕은 지식과 문해력 수준만 확인하고 자신감과 자존감이 곤두박질치는 지경을 맞닥뜨렸다.
여러 인사들이 극찬하는 이 책이 나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 그래서 자괴감만 느낀다는 것이 부끄럽고 괴로웠다. 어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도 그때부터였다. 책에 대한 열정이 얼어버리기라도 한 듯.
한동안 책을 읽지 못했다. 한 문장도 읽을 수 없었다. 책이라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최근 들어 다시 조금씩 책을 펼치고 있다. 좋아했던 에세이와 소설류. 한 자 한 자 더듬으며 천천히 읽어나가는데 그들이 주는 위로와 공감에 마음이 녹았다. 나처럼 괴로울 때 그들이 어떻게 다시 일어섰는지, 혼자라고 느낄 때는 어떻게 극복했는지, 숨 막히게 힘든 날이 이어질 때조차 어떻게 웃을 수 있었는지. 진실한 감정으로 써내려 간 글들은 따뜻했다.
그때 알았다. 자기계발서만이 자기계발서가 아니라는 것. 주 내용에 따라 편의상 그렇게 분류는 했겠지만 나를 일으키고 다시 세울 메시지가 있다면 어떤 종류의 책이든 자기계발서였다. 내게 필요한 삶의 방향은, 지금은 자기계발서가 아닌 자기계발서에 있었다.
자기계발서 독자들 앞에선 어쩐지 작아졌다. 누군가의 "소설 같은 책은 다 읽고 나면 남는 게 없어. 굳이 사서 볼 필요도 없는 것 같고."라는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단단히 주눅이 들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는군요. 나는 그런 책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내일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것들이 내게는 자기계발서인 거죠."
책에서 시작된 마음의 변화는 일상으로 이어졌다. 세상이 '좋다'라고 평가하는 것에 따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가는지. 또 그들을 따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순간 가랑이가 찢어지는지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삶의 지표는 타인이 아닌 내게 있어야 한다. 타인의 조언을 경청하되 주체는 나여야 한다.
자기계발서 앞에서 느꼈던 자괴감은 이제 자존감으로 진화하고 있다.
오늘도 나는 나를 위한 자기계발서를 편다. 울고 웃으며 공감하고 위로받는다. 책을 덮고 나면 그전보다 단단한 사람이 돼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