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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슨 Feb 03. 2024

자발적 김밥 아줌마

행복을 찾아주는 김밥의 맛

어떤 음식에는 오래된 기억의 맛이 있다. 어딘가에 묻혀있던 추억이 떠오르는 것이다. 최근엔 김밥이 그랬다. 김밥을 싸 먹는데 내가 내 아이들만하던 어떤 날의 맛이 났다.




"엄마~ 저녁에 김밥 먹을까~?"


뭐어~???

13살, 10살 아이가 싸준다는 것도, 사준다는 것도 아닐 테니 분명 내게 준비해 달라는 말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김밥이라... 재료 준비할 생각에 한숨이 나온 게 사실이지만 나름 흔쾌히 해당 메뉴를 승인했다.


요즘 물가를 생각하면 사 먹는 게 싸다. 그런데도 '밥 조금, 재료 많이'를 추구하는지라 번거로워도 집에서 만들기로 했다. 어쩐지 집김밥을 하고 싶은 날이었다.

달걀을 풀어 두툼하게 부치고,
당근을 수북하게 채 썰어 볶고,
햄을 길게 잘라 굽고,
단무지와 우엉은 물기를 빼서 준비한다.
어묵은 없어서 빼고, 시금치 대신 초록의 색을 낼 깻잎을 꺼냈다.

뜨거운 밥을 한 김 식혀 소금과 참기름과 식초, 통깨를 뿌려 골고루 섞는다.

김 한 장을 통째로는 잘 못 마는지라 반으로 자른 김을 도마 위에 놓고 밥을 얇게 펴 올린다. 이제 준비한 재료를 차곡차곡 쌓아 말아주면 끝.


아이들에게 한 접시씩 내어주니 먹방 유튜버라도 되는 듯 신나게 집어 먹는다.

"역시 엄마 김밥이 최고야!"
"엄마 김밥집 차려도 되겠다~"
"그래? 아빠한테 엄마 김밥집 하나 차려 달라고 할까~?"

한참을 기분 좋은 농담을 주고받다 보니 어릴 때 엄마가 김밥을 싸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는 종종 김밥을 쌌다. 우리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메뉴였다. 확실히 사서 먹는 게 저렴한 시절이었는데도 엄마는 집에서 싸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너네가 다 김밥 좋아했잖아. 네 아빠가 특히 그랬고. 사서 먹는 거 지금이야 속 든든히 들었지만 그때만 해도 엄청 부실했어. 기왕이면 맛있게 먹는 게 좋으니까 싸 먹었지."

가족에게 더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어서. 그게 이유였다. 잘 먹는 모습 보는 게 주부로서 가장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참기름 한 방울도 아끼려던 엄마의 김밥은 표면이 다소 메마르고 투박했지만 듬뿍 들어간 재료의 조화와 풍미는 어떤 음식보다 훌륭했다.



김밥은 큰 접시 한가득 쌓아 올려 먹어야 제 맛. 하나하나 집어 먹다 보면 나도 모르게 위장의 용량을 훌쩍 뛰어넘어 '아이고 배 부르다~' 남산만 한 배를 쓰다듬으며 드러눕게 된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내 살들은 김밥에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엄마가 바닥에 쟁반과 도마를 깔아놓고 김밥을 쌀 때 옆에 앉아 하나씩 얻어먹는 재미도 좋았다.

"자르지 말고 그냥 줘~."

오빠와 자르지 않은 기다란 김밥을 통째로 들고 먹으며 깔깔대던 기억이 떠올라 쿡쿡 혼자 웃음을 삼켰다.

내가 힘들어도 굳이 집김밥을 만들려는 것도 이렇게 즐거웠던 추억 때문이 아닐까.

짧은 입 대회가 있다면 순위권에 들 2호도 김밥을 한 입 크게 넣고 우걱우걱 잘도 먹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달뜬 기분이 된다.

과거의 나도, 지금의 나도 별 것 아닌 일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느끼는 걸 보면 음식에는 소소한 행복을 깨닫게 하는 마력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엄마~ 더 주세요."

어쩐 일인지 아이가 리필까지 한다. 그게 또 기분이 좋아 김밥 마는 손에 신바람이 묻어난다.



어떤 음식에는 오래된 기억의 맛이 있는데 내게 김밥은 행복의 맛이다. 재료준비부터 치우는 과정까지 만만치 않은 여정이지만 가족에게 더 든든하고 맛있는 한 끼를 차려주고 싶어서, 잘 먹는 모습 보는 게 좋아서 굳이 집김밥을 만든다.


먼 훗날 내 아이들에겐 김밥이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모쪼록 일상의 행복을 깨닫는 맛으로 피어나면 좋겠다. 흔한 편의점 김밥에도 그 추억이 소환된다면 거친 일상에도 따스한 공기가 흐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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