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년 차, 큰 아이 임신 중일 때 시어머니에게 들은 말이다. 집에 딸기를 사놨으니 와서 먹으라 시는데 며칠간 가지 못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아직도 딸기를 먹을 때면 그날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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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시댁에 하나뿐인 며느리로 입성했다. 시댁 식구들과 찐 가족처럼 잘 지내는 삶을 꿈꿨지만 시어머니가 결혼식 폐백에서 “너 (신혼여행) 다녀와서 보자!”며 눈을 흘길 때부터, 신혼여행 후 첫인사 자리에서 “이제 친정하고는 정 떼야하니 자주 가지 마라!”며 으름장을 놓을 때부터, 결혼은 했으나 늘 친정에 와 있는 손윗시누이 둘이 “3년 벙어리, 3년 귀머거리”를 강조할 때부터 내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을 것이라 직감했다.
시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차고 넘치는 분이다. 고기나 과일을 먹을 때, 지인에게 맛있는 음식을 얻었을 때, 그 밖의 여러 경우에 자식들이 생각나 다 같이 시간 보내길 원하신다. 때문에 일주일에 서너 번씩 온 가족이 모였다. 부름에 응하지 않으면 며칠의 눈칫밥이 이어지고. 결혼 전 부모님은 한 달에 두 어번만 찾아뵈면 된다던 남편은 희대의 사기꾼이었던가.
같이 만나 즐거운 것도 한두 번이지. 시어머니와 손윗 시누이 둘이 늘 함께 있는 시댁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내겐 친정과 정을 떼라더니, 시댁의 모든 것이 모순 같았다. 게다가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를 반복하며 인정보다 질책받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그즈음부터 우울감이 시작됐던 것 같다.
나는 인정받고 싶었다. 무엇을 잘하지 못해도 나라는 존재만으로도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난 늘 부족한 사람, 모자란 사람인 모양이다.
산후우울증, 육아우울증까지 더해져 하루에도 수차례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가 머리를 저으며 참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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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0여 년이 흘렀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더니 가족이 공중분해될 위기를 몇 번 겪으며 나는 삶을 좀 더 알게 됐고(아마도), 맹수같이 날카로웠던 시어머니는 이빨이 많이 닳았다. 덕분에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고 깊어졌다.
시어머니는 장남의 아내로 당신의 시어머니와 시동생들까지 다 챙겨야 했던,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시절을 견뎌낸 전통적인 K-며느리다. 어느 날부터 “예전엔 그렇게 도망가고 싶었는데 우리 OO(내 남편) 때문에 그럴 수 없었지.”라는 말씀에 가슴이 아렸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키우다 보니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었다.
어쩌면 자식들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결혼으로 연결된 가족들을 건사하느라 정작 내 자식들에게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미안함과 아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등바등 살다가 이제 좀 여유가 있어지니 자식들은 다 커서 품을 떠났고, 남은 건 병들고 아픈 몸뿐이라니..
이쯤 되니 그의 일생이 몹시 애틋해졌다. 여자 대 여자로서 더 가까워진 느낌이랄까. 참 이상하게도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던 일종의 가해자에게서 연대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며느리 손에 물 묻히지 말라고 손수 그릇을 헹궈내는 시어머니의 어깨를 주무르며 “저는 도망 안 가고 내쫓을 거예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시어머니는 여전히 자식들에게 관심이 많으시다. 매일 전화로 일상을 물으시고, 쉬는 날이면 당연히 우리 가족을 기다리신다. 또, 뵙고 온 다음 날에도 목소리 못 들은 지 오래됐다며 전화를 하시고, 일주일 만에 만나도 얼굴 까먹을 뻔했다며 그렇게 반가워하신다. 그런 시어머니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 여전하다. 그럼에도 같은 여자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함께 건너온 시간 덕분에 “누가 보면 저희 외국에 사는 줄 알겠어요~”라고 건방을 떨며 웃어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