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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슨 Mar 09. 2024

내 남편의 전생은 어벤저스

남편이 또 외박을 했다

"사업하는 남자니 집에서 신경 쓸 거 없게 네가 잘해야..."

"사업하는 남자는 그럴 수도 있으니 네가 마음이 넓어야..."

"사업하는 게 보통 일이니~. 네가 잘 챙겨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사업하는 게 무슨 벼슬도 아닌데 사업하는 남자의 아내에겐 굉장한 덕목이 필요한가 싶었다. 더욱이 시부모님에 친정부모님까지 그런 말씀을 반복하시면 심사가 뒤틀리기도 했다.


결혼 전 남편의 측근에게 들은 "사업하는 사람은 밖에서 애만 안 만들어오면 된다"는 말은 한동안 두고두고 내 속을 들쑤셨다.


과거형이다. 그런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결혼 십여 년 만에 나는 한없이 깊은 이해심을 가진 여자가 됐으니까.


Image by Kalpesh Ajugia from Pixabay


사업하는 사람을 보면, 그것도 외벌이인 사람을 보면 많은 이들이 힘들겠다며 등을 토닥인다. 잘 모르는 어떤 이들은 그런 남편에게 맘 편히 돈 받아 쓰는 전업주부인 나를 부럽다고도 한다. 사업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물론 대단한 일이다. 옆에서 지켜본 결과 일반 직장인들에 비해 책임감이나 업무의 강도에서 극명한 차이가 있다. 더 많은 시간 더 깊이 있게 일을 한다. 쉬는 날에도 쉬기만 하지 못한다. 그만큼 스트레스의 양도 상당하겠지.


그래, 그건 인정!!! 그런데, 그런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에게도 어려움은 있다. 돈 받아 쓰는 건 맞지만 맘 편히는 아니다. 매일 덕을 쌓는 심정으로 사는 배우자들의 삶을 누가 알까. 그래서 사업하는 남편과 사는 아내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단, 모든 사업가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니 오해는 없길 바란다.


내 경우를 빗대어 보면 사업가의 아내로 살기 위해선 마음가짐의 변화가 필요하다. 인내하고 이해할 것. 자애로울 것. 한마디로 성직자 같을 것. 여기서는 특히 얼마나 깊은 이해와 인내가 있어야 하는지 강조하고 싶은데 연락 없이 외박을 해도 너그럽게 넘어가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남편은 마케팅 대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업무의 특성상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가 이어지는 날이 잦다. 때문에 남편의 귀가 시간을 파악할 수 없다. 어떤 날은 뜬금없이 22~23시쯤 귀가하고, 어떤 날은 새날이 밝아도 깜깜무소식이다.


"늦으면 늦는다고 연락을 줄 수 있을까?"

갑자기 일정이 생기는 경우가 많으므로 불가.


"술을 마시는지 사무로 늦는지 연락을 줄 수 있을까?"

사무를 보다가도 갑자기 술을 마시러 가게 될 수 있으므로 불가.


"언제쯤 들어오는지 연락을 줄 수 있을까?"

시간을 확정 지을 수 없으므로 불가.


"못 들어온 날에는 아침에 연락을 줄 수 있을까?"

최대한 노력해 보겠음.


남편은 대쪽 같았다. 오히려 연락을 요구하는 나를 못마땅해했다. "내가 놀다가 늦어?"라고 본인이 더 큰 소리를 친 적도 있다. 싸움에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고, 어차피 말을 해봤자 변하지 않을 것이며, 애들에게서 아빠를 뺏고 싶지 않아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이게 무슨 쌍팔년도 X 같은 마인드냐!!', '그럴 거면 결혼은 왜 해서 사람을 X고생시키냐!!', 'X 싸러 가서라도 메시지 하나 할 틈 없냐!!!', '솔직히 밖에서 뭐 하고 다니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참나 어이가 없다!!' 속으로 쏟아낸 욕지거리만 모아도 지구를 수백 바퀴는 돌 것이다.


참고로 나는 술자리에 가있는 남편에게 웬만해선 전화 한 통 하지 않는다. 술 좀 그만 마셔라 잔소리도 하지 않는다. 다행히 나도 남편이 하는 일의 유형을 잘 알아서 기본 이해도가 높은 편이다.


사정을 아는 지인들에게는 "나 죽으면 사리가 쏟아져 나올 거야. 그 사리는 봉은사에 모셔줘. 그렇게라도 강남에 살아보자."며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내 이해심과 인내심의 깊이를. 어떤 마음으로 그 시간을 버텨냈는지.


Image by Gerd Altmann from Pixabay

언제 들어올지 모를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걱정하고 화가 났다가 또 걱정하고 기다리는 무한 굴레의 시간들은 끔찍하고 애잔했다. 완전히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이 안쓰러웠다가 또 연락 한 번 먼저 하지 않는다며 분노했다가 새벽녘에 녹초가 되어 돌아온 남편이 또 안 돼 보이고... 매일 널뛰는 감정에 혼자 지치다 보니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마음에 상처가 생기고 딱지가 앉고 또 상처가 생기고 딱지가 앉더니 이내 딱딱하게 굳기라도 한 걸까. 이제는 남편이 늦거나 들어오지 않아도 마음이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또 일이 많은가 보네.

(사무로 늦는 날들이 많음. 혹은 다음 날 일찍 미팅이 있을 때는 사무실에서 잠.)


또 누구랑 술 마시고 자나 보네.

(술 마시고 늦는 날들도 많은데 술 마시면 잠드는 게 술버릇임.)


또 대리가 안 잡히나 보네.

(회사는 서울이고 집은 경기도의 신도시. 술 마시고 대리기사가 잡히지 않아 차나 사무실에서 자는 날들도 잦음.)


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어쩌다 자고 일어났는데 4~6시경 '늦어서 사우나 감.' 정도의 메시지라도 와 있으면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어지고, 성모마리아처럼 자애로워진다.




어제 남편은 또 외박을 했다. 아침 일찍 들어오며 술 마시고 사무실에서 잤다는 그는 피곤에 지친 기색이었다. 그런 남편에게 이젠 이렇게 말한다.


"그냥 방을 잡고 편히 자~.  오늘처럼 휴일일 땐 아예 충분히 자고 오고."


자주 뵙는 시부모님은 이런 상황을 일부 아셔서 더 이상 내게 "사업하는 남자니까 네가 잘해야..."라는 말씀은 안 하신다. 오히려 "네가 참 마음이 넓다~."라신다. 그러면 나는 "그러니까요. 저 아니었으면 진작 소박맞았을 거예요. 지금처럼 사업하는 것도 다 제가 다 참고 이해하니까 가능한 거죠~."라며 껄껄껄 너스레를 떤다.


남편에게도 당당히 말한다. "당신은 전쟁에 어벤저스였을 거야. 세계 평화 정도는 지켜냈으니까 이런 마누라랑 살지~."


이쯤 되면 다른 쪽에서도 얼마나 많이 인내하며 살지 감이 올 것이다.


Image by 19299194 from Pixabay


사업하는 남자의 아내로 사는 것. 어쩌면 그것은 끊임없이 인내하며 깊고 깊은 이해심을 얻는 수행의 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남편도 나에 대해 양질의 이해심을 갖고 있는 부분이 있겠지.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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