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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슨 Dec 19. 2024

나태지옥에 빠졌다

최선을 다 해 즐기고 싶은 삶

DEEP 앙상블 팀이 된 지 4개월 만에 나태지옥에 빠지고 말았다. 경계해야 할 나태함에 철사줄로 꽁꽁 묶였다. 아니, 스스로 묶었다. 




12월 29일에는 올해의 마지막 초청 공연이 있다. 한 음악학원의 연말 연주회의 오프닝에 올라 세 곡을 연주하기로 한 것이다. 이미 한 차례씩 무대에 올라 연주했던 경험이 있는 곡들이어서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연이다.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부담은 있어야 적극적일텐데 부담을 너무 내려놨다는 것, 그게 문제였던 걸까.


공연을 몇 주 앞둔 수요일 오전, DEEP 연습실에서 가볍게 합주 연습을 하기로 했다. 매일 점심시간에 임시로 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내가 참여할 수 있는 연습 시간은 길어야 40분이다. 마음이 급했다. 내 사정을 아는 팀원들도 서둘러 자리를 잡고 합주의 채비를 했다.


첫 곡의 반주에 맞춰 활을 움직이자마자 느낌이 왔다. 내 바이올린에서 나는 소리가 외계에서 보내오는 신호 같다는 것. 팀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혼자 튀고 있었다. 나쁜 방향으로! 리에서 찌직찌직 전기가 느껴졌다. 섬뜩하고 오싹했다. 등에식은땀이 흐르고 두피에도 땀들이 솟구치는 듯했다.


망했다!!!!

나 지난 한 주 동안 연습을 한 번도 안 했잖아?!?!?!


그제야 깨달았다. 연습을 게을리했다는 것을!


아무리 여러 차례 경험이 있는 곡이라 해도 연습을 하지 않은 결과는 처참했다. 자세가 바르지 않았고, 활은 허락된 경로를 벗어나 브릿지 영역을 침범하기 일쑤였다. 수시로 음이탈이 났다. 긴장이 되니 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소리가 더 이상해졌다. 내가 내는 소리가 끔찍했다. 두 번째, 세 번째 곡이라고 어디 다를까.


짧은 시간 집중적으로 합주를 해야 했는데도 준비가 돼 있지 않아 다 망쳐버렸다. 그런 내가 참을 수 없이 한심했다.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 다녀오느라 피곤하다,

애들 챙기느라 정신없다,

살림하느라 바쁘다,

이미 했던 곡들이라 만만하다.


스스로 합리화했던 내가 홀로그램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나태함의 결과는 참했다.


합주는 두 가지 이상의 악기로 동시에 연주하는 것이다. 내 나태함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당연히 팀 전체에까지 영향을 준다. 솔로라면 내 부족함이 나만의 부족함으로 끝나지만 합주에서는 그렇지 않다. 내가 팀의 불협화음을 주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AI 이미지


나는 나를 나태지옥에 던져버렸다. 물귀신처럼 팀까지 끌고 들어가려고 했다. 의도를 했든 그렇지 않든. 회개하고 구원받기 위해 돌아오자마자 바이올린을 켰다. 튜닝 어플을 열어 소리를 맞추고 활에 송진을 바르며 만반의 준비를 맞췄다.


스마트폰에서 첫 번째 곡의 반주가 흘러나왔다.


찌지직 쁙쁙


외계에서 온 듯한 소리가 다시 불쑥불쑥 존재감을 드러냈다. 연주자로서의 나태함을 꾸짖며 정신 차리라는 소리였다. 연주 실력이 아직 하급인데도 최상급이라도 되는 듯 군 내 오만에 대한 채찍질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온전한 소리가 날 때까지 연습해야지 어쩌겠어!!!




방송인 유재석은 성공의 비결로 하루도 빠짐없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했다. 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그 간절함만큼 최선에 최선을 더해야 한다.


나는 바이올린으로 대단한 성공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연주하며 발전하고 즐기는 삶을 사는 것, 그거면 된다. 하지만 더 잘하기 위해, 튀지 않고 잘 어우러지는 합주를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최선이 있어야만 한다.


내 삶도 돌아보며 자문한다.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게으름을 부리진 않았나. 스스로 눈치채지 못한 채 나태지옥을 드나들고 있었던 건 아닌가. 쉽게 답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AI 이미지

오늘은 두 시간 연습을 했다. 반주를 들으면서도 하고, 매끄럽지 않은 부분은 반주 없이 될 때까지 반복하기도 했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나는 다시 초심을 찾아 연습에 매진할 것이다. 다음 연습 때는 외계의 소리가 아닌 아름답게 잘 어우러지는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나태지옥에 다녀왔더니 아주 정신이 번뜩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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