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밥 한 공기에는 세대와 세대를 잇는 마음이 담겨 있는 모양이다.
학생들의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워킹맘이 된 후 첫 방학을 바쁘게 보내느라 내 체력은 이미 바닥을 보인 지 오래였다. 때문에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하는 날들이 있었는데 그날도 그랬다. 결국 늦잠을 자고 말았다.
눈을 뜨자마자 등골이 서늘했다. '아침밥 준비를 안 했잖아!' 아이들이 늦지 않게 등교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갑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는 텅 빈 냉장고엔 빠르게 먹일만한 것이 없었다. 즉석식품이라도 사놓을 걸, 후회가 스쳤다.
아침밥 준비가 막막해 한숨을 내뱉던 순간, '간장계란밥'이 생각났다. 얼른 달걀 두 알을 꺼내 프라이를 했다. 그 사이 전자레인지 안에서는 냉동밥이 힘차게 돌아갔다. 간장계란밥도 분명 밥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아마도 형편상 줄 수 있는 게 겨우 이것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었던 것 같다.
뜨거운 밥에 반숙으로 익힌 달걀 프라이를 넣고 간장 두 숟가락과 참기름 두어 방울을 둘렀다. 고소한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밥 먹자."
겨우 간장에 비빈 밥일 뿐인데도 아이들은 김치까지 얹어 야무지게 먹었다. 한 그릇 시원하게 비워내고 한 그릇 더! 엄지를 치켜들며 맛있게 먹는 아이들의 모습에 내 어린 시절이 겹쳐 보였다.
학창 시절, 아침밥은 아침잠이 많은 엄마를 대신해 주로 아빠 담당이었다. 내가 아무리 일찍 학교에 가더라도 아빠는 더 일찍 일어나 밥 준비를 했다. 아빠표 아침밥 중 특히 마가린간장밥이 기억에 남는다. 뜨거운 밥 안에 마가린을 감춘 뒤 간장을 넣고 비벼 먹는 것이었다. 밥의 온기에 마가린이 사르르 녹아 밥알이 코팅되는데 여기에 간장이 더해지니 고소하고 달콤 짭짤한 게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돈다.
나중에야 알았다. 마간린간장밥은 당시 형편에서 최선의 아침밥이었다는 것을. 아빠는 따뜻한 밥과 국, 조화로운 반찬 없이 간장에 대충 비벼주는 밥이 미안했다고 했다. 그래서였는지, 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말없이 옆에 앉아 있었다. 아빠의 침묵은 미안함과 사랑이 함축된 언어였다.
"아빠, 그거 진짜 맛있었어요. 매일 아침밥 챙겨줘서 고마워요.”
정말이지, 나는 매일 아빠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등교하는 게 몹시 자랑스러웠다. 그런 아빠가 있다는 것 큰 복이었다.
내 마음이 그때의 아빠와 다를 바 없었다.
“엄마가 저녁엔 맛있는 거 해 줄게.”
"엄마, 이것도 엄청 맛있어. 한 그릇 더 주세요.”
아이들이 맛있게 먹어 준 덕분에 큰 양푼이 금세 비워졌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도 사르르 풀리는 듯했다.
큰 아이가 간장계란밥에 김치를 얹어 김치초밥이라고 했다. 작은 아이는 그게 웃기다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미안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아빠의 마가린간장밥을 자랑스러워했듯이 내 아이들도 그럴 거라 믿는다. 화려한 재료는 없지만 달걀 두 알이면 충분했다.
금세 기분이 가뿐해졌다. 아이들에 질세라 나도 얼른 간장계란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떴다.
“맛있다.”
세대를 잇는 따뜻한 사랑의 맛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