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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강철저 Dec 09. 2022

아이를 낳고는 까치한테도 감정이입이 된다.

내 삶의 넓은 여백을 사랑해보려 한다. 

남편과 함께 뒷산을 올랐다. 운동을 좀 해야겠다 싶어서.  

산을 완만하게 오르는 데크길을 따라 걷는데 하늘을 올려다보던 남편이 허공을 향해 손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선 까치 한 마리가 나뭇가지를 물고 날아가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물고 가던 까치가 향하는 곳은 이제 막 짓기 시작한 나무 위 둥지였다. 둥지 안에서 다른 한 마리의 까치가 요리조리 움직이며 새로 가져온 나뭇가지를 올리고 있었다. 젠가 같기도 하고 테트리스 같기도 한 나뭇가지를 올리고 다지기를 한참 하더니 잘 안 되겠다 싶은지 나뭇가지 하나를 빼서 둥지 밖으로 버렸다. 다시 새로운 나뭇가지를 구하라고 호통을 치듯 둥지 안의 까치가 깍깍대자 다른 까치는 날아올랐다. 더 멀리 가서 더 나은 나뭇가지를 구해오겠다는 듯이.


겨울이라 산에는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 뿐이었다. 야위고 허름해 보이는 나무들 중에서 유독 앙상해 보이고 높이 솟아오른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있는 두 마리의 까치를 보니 왠지 모르게 응원해주고 싶어졌다. 한참을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고 있는데 남편이 옆에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우리 같네, 우리도 00이 임신하고 집을 샀잖아. 둥지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그러고 보니 둥지를 짓고 있는 까치들의 모습이 마치 첫째를 임신해서 부른 배를 부여잡고 집을 보러 다니던 우리 같았다. 


이제는 까치에게도 감정이입이 되다니.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는 내가 포유류라는 걸 깨달았는데 이제는 조류에게도 공감이 되는구나 싶었다. 아무렴 새끼를 낳는 생명이라면 누굴 데려와도 감정이입이 될 것 같다. 너도 새끼를 낳고 키우느라 힘들지.라고. 


동물이 새끼를 갖고 둥지를 틀고 먹이를 물어오고 키우고 하는 과정들이 이미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면 까치나 나나 별 다를 게 없다. 지구상의 모든 새끼를 키우는 동물들과 나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거다. 


미래를 걱정하고 대비하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살지만 근원적인 측면에서는 나는 까치와 같은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 뭔가 나의 현실적인 걱정들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다. 깃털만큼


주변을 둘러봐도 나와 같은 사람은 없다. 

아이를 셋 키우고 그것도 아직 영유아인 아이를 셋 키우는 사람이 주변에 잘 없다. 그래서 가끔은 대체 어린아이 셋을 키우는 사람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둥지를 짓고 먹이를 물고 오느라 바쁘겠지.


가끔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닌가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아이들이 잘 먹으면 이쁘다가도 나중에 사춘기 때에 얼마나 많이 먹을까 싶어 걱정되기도 하는 거다. 남들은 교육비를 걱정할 때에 나는 식비를 걱정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능력도 안되면서 왜 애를 셋이나 낳았냐고 비난받을까 싶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든다. 

 

그런데 그런 상념들 속에서도 한 발자국 물러서서 내 상황을 내려다보게 되는 일들은 이런 사소한 자각이 있어서다. 나나 까치나 별다를 게 없다는 자각.


그러니까 내가 까치의 입장으로 지금의 나를 내려다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해보는 거다. 

그러면 까치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너나 나나 새끼를 잘 키우고 둥지 안에서 따뜻하게 겨울을 나는 것만 생각하고 살자. 그렇게 살다 보면 결국에는 봄이 올 거니까. 


나의 수만 가지 걱정들과 상념들의 무게를 떠나서 그저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해결이 되는 일들이 있다. 겨울 내내 쌓인 눈들을 내가 걱정만 한다고 사라지진 않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봄이 오고 봄볕 아래 놓인 눈은 내가 애쓰지 않아도 흔적 없이 사라진다. 


나는 쌓인 눈을 바라보고 걱정하느라 겨울을 힘겹게 나고 있었다. 앞으로의 인생이 계속 이런 겨울 같을까 봐.

그런데 그냥 지금 할 일을 하면서 겨울을 나면 되는 거였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사실은 아이를 키우는 일 자체가 어렵지는 않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해야 하는 걱정과 고민의 무게가 버거울 뿐이었다. 그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힘겨움 들을 다시 바라본다. 


겨울 내내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보고 있으면 이 나무가 여름 내내 푸르렀다는 것을 자꾸만 잊게 된다. 마찬가지로 다음 해가 오면 다시 새순이 돋고 울창해진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들이 나타난다. 


지금 내 시간들도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를 만드는 시간이라고 생각해본다. 

남들의 눈에는 그저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로만 보일지라도. 나 스스로는 겨울 내내 새순을 만들기 위해 몸을 움츠리고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고 생각해보는 거다. 그리고 언젠가 새순이 나고 잎을 활짝 피워내는 때가 올 것이다. 


한참 전에 읽은 <월든>에서도 이런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직접 호숫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썼던 글인데 가끔씩 생각이 나곤 한다. 


어떤 일에도 지금 이 순간의 풍요를 절대로 희생할 수 없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나는 내 삶에 넓은 여백이 있는 것을 사랑한다. 여름 아침, 늘 하는 목욕을 한 다음 해가 뜰 때부터 정오까지 해가 드는 문간에 앉아 있곤 했다. 소나무, 호두나무, 옻나무를 배경으로 방해받지 않는 고독과 고요 속에서 환희에 빠졌다. 그동안 새들이 주변에서 노래를 하기도 소리 없이 집 안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마침내 서쪽 창문으로 비치는 해를 보거나, 먼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여행자의 마차 소리를 들으면 퍼뜩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깨달았다. 그런 시간을 보내던 시절에 나는 옥수수가 밤사이 자라는 것처럼 쑥쑥 자랐다. 그런 시간은 나에게 손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훨씬 이로웠다. 

_<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나도 내 삶의 넓은 여백을 사랑해보려 한다. 


왜 나는 하루를 알차게 보내지 못하냐고, 왜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살림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그러지 못하느냐고 스스로를 닦달하지 않으려고 한다. 때로는 이렇게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숲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걷기만 하면서 오늘처럼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해보고 싶다. 


문명은 나에게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쪼개어보도록 강요하고 나의 머리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아주 잠시 산을 오르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까치에게 감정이입도 해보면서, 그렇게 현재라는 순간을 잡아채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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