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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강철저 Sep 16. 2022

육아 금기어

생활지도부에는 오랫동안 내려오는 금기어가 있다.

1. 생활지도부에는 오랫동안 내려오는 금기어가 있다. 


나는 고등학교 생활지도부, 예전에 학생부라고 불리는 곳에서 3년 정도 근무했었다. 학생들도 기피하고 선생님들도 기피하는 부서이다. 두 번째 발령 난 학교에 첫 업무가 생활지도부의 선도 업무였으니 모두가 기피해서 남은 자리에 새로 전입한 내가 들어간 거였다. 우리 부서는 나처럼 새로 온 교사들과 기간제 교사들로 꾸려져 있었다. 학교 폭력 업무를 맡은 선생님은 나와 비슷한 연배였는데 원래 업무가 다른 것인 줄 알고 왔는데 막상 3월 2일에 바뀌어있었다며 어이없어했다. 


우리는 시작과 동시에 서로에게 전우애를 느꼈다. 힘든 일을 하는 부서지만 대신 서로 으쌰 으쌰 하다 보니 금방 친해졌다. 같이 있는 선생님들이 좋았기에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런 우리에게 금기어가 하나 있었다. 



요새 학교가 조용하네?


이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면 곧 얼마 안 있어 학폭(학교폭력)이 왕왕 터졌다. 교권이 바닥을 치고 우정이란 가루가 되어 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애들끼리의 싸움에 학부모는 서로를 고소하고, 말리는 교사를 고소했다. 학교에 경찰관이 오고 학폭위(학교폭력위원회)에 휠체어를 타고 등장하는 학생들을 보기도 했다. 이런 일상을 치르며 혼이 빠지는 하루하루를 보내다가도 가끔은 교무실에 적막이 찾아오는 때도 있다. 그런 날이면 우리는 그것을 종전이라 여기지 않고 전쟁과 전쟁 사이의 임시적인 평화로 바라봤다. 앞으로 치를 다음 전쟁을 위해 다시 정비를 하고 체력을 비축해두는 시기였다. 섣불리 종전을 언급하지 않았다. 


원래 상황이 어려울수록 집단 구성원은 단결하기 나름이다. 일이 힘들고 고될수록, 개떡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날수록, 우리는 꽁꽁 뭉쳤다. 그리고 서로 다짐했다. 금기어를 내뱉지 말자고, 평화를 깨지 말자고. 그렇게 금기어를 조심하며 매일 아침 오늘도 별일 없이 지나가길 소망하며 교무실에 들어섰다. 퇴근을 하며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보낼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렇게 자주 사건 사고가 터지고 아주 가끔 평화롭던 생활지도부를 3년이나 버틴 건 모두 마음 맞는 전우, 아니 동료 교사들 덕분이었다. 




2. 육아에도 금기어가 있다. 


지나고 보면 추억이 많았던 생활지도부의 일들이 요즘 종종 생각나는 건 육아에도 금기어가 있기 때문이다. 영유아만 셋인 우리 가족이 양가 통틀어 2년이 넘어가도록 아무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 신기하긴 했다. 아마 어느 감기가 코로나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마음속으로만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여보, 우리 집 말고는 다 걸렸어!!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얘기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다음 날 남편은 열이 오르더니 확진이었다. 금기어는 이래서 금기인 거다. 


육아에도 금기어가 있다. 

우리 애가 통잠을 자요! 하면 갑자기 밤에 깨서 운다. 우리 애는 순한 편이에요! 하면 갑자기 길에서 드러눕는다. 우리 애들은 골고루 잘 먹어요! 하면 숟가락을 내동댕이치고, 우리 애들은 잘 안 아파요! 하면 애들이 콧물을 줄줄 흘린다. 대체 이건 무슨 조화일까? 초보 엄마의 자만을 뭉개는 저주의 신이라도 있는 걸까.


이런 일들을 몇 번 겪고는 내 나름의 육아 금기어가 생겼다. 아이들이 순하다는 말이나 아이들이 잘 안 아프다는 말이나 아이들이 인제 좀 편해졌다는 말이 바로 육아 금기어다. 나도 모르게 혼자 생각으로는 '아 인제는 좀 살 것 같다.' 싶기도 하지만 남들 앞에선 '우리 애들이 순하고 밥도 잘 먹고 잘 안 아프고 그래서 내가 좀 살 것 같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어쩌면 아이들은 일정한 주기로 생떼를 부리고 길에 드러눕고 편식을 하고 아프기도 하는데 괜히 우리 애는 안 그럴 거라고 기대했다가 실망을 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3. 나는 지금 개똥이 세 마리를 키운다.


친정 엄마는 우리 아이들을 보며 "우리 강아지~ 할머니 강아지~"라고 부르길래 왜 그렇게 부르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엄마가 '잘 크라'고 그렇게 부르는 거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예전에 왕들은 어렸을 때 이름 대신 개똥이라고 불렀다고. 잡귀들이 개똥이라고 부르면 왕인 줄 몰라서 해코지를 안 한다는, 출처를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린 아이들의 생존율이 낮은 시기였으니 이런 미신이 있을 법도 한데 그렇다 치더라도 신기했다. 고귀하고 높은 왕이라서 이름도 고급지게 지었을 줄 알았는데 개똥이라니. 개똥아~ 부를수록 친근하긴 하다. 그런데 이것도 결국 금기어와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나는 지금 개똥이 세 마리를 키운다. 우리 개똥이들은 자주 드러눕고 자주 깨고 밥 먹을 땐 편식하고 길에 드러눕고 생떼를 부리고 때때로 돌아가며 아프기까지 한다. 그래도 나는 우리 개똥이들을 너무나 사랑한다. 


육아에 금기어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일상의 평화로움에 좀 더 감사하라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 이런 평화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실망하지만 감사하다고 생각하면 잠시 위기가 와도 극복할 수 있다. 


나는 오늘도 이런 금기어를 섣불리 말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어 다행이다. 육아란 어쩌면 점점 더 겸손해지는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개똥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라 감사한 일이듯,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건강하게 있어주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니다. 감사할 일이 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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