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그리고 캘리그라피.
뭘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니? 모두 다 자연인데.
"아빠는 서예가 산이라면, 캘리그라피는 꽃이라고 생각해.
사실 너도 등산가자는 말보다, 꽃구경가자는 말이 더 달콤하잖아? 같은 산구경인데 말이야.
그렇게 차근히 산에 초대하다보면 정상도 궁금해지고, 조금 더 깊은 산도 가려고 하겠지.
근데……, 미래의 가이드가 벌써부터 그렇게 자연을 가리면 쓰나.”
흰 종이 위에 먹색의 글자가 아닌 휘황찬란한 색들의 글자들이 올라오고,
흐르는 물에 빨아서 쓰는 붓 대신에
뚜껑으로 열었다 닫는 붓펜이 점점 더 예쁨 받으니
먼지이불을 덮게 될 운명에 처한 것 같은 문방사우가 안쓰럽게 보였다.
그 때 아버지가 말씀해 주셨다.
그것 역시 '자연'이라고.
고인 물은 반드시 썩기 마련이다.
그러니 흘러가는 저 물을 아쉽더라도 흘려보내야 오래도록 맑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더 위험하니까.
드라마와 영화에서 서예자문을 맡으면서도,
21세기 예술가로 활동하시는 아버지의 붓은
30년이 넘도록 하루에도 몇 번 씩 타임슬립을 한다.
사극 드라마와 영화 속 글씨들을 재현해 내기 위해서
조선시대로 갔다가, 현 시대의 사람들에 감성에 맞는 글씨를 위해서 디지털시대로 넘어오신다.
오롯이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도구임을 잊지 않으시기 때문일까?
같은 붓으로 전통과 미래가 초단위로 바뀌어도,
그 경계선은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자연스럽다.
내가 서예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할 때에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은 딱 하나다.
자외구서字外求書. 글자 밖에서 글씨 구해라.
글자 안에 갇힌 마음을 더 깊고 멀리 꺼내는 것.
기본기가 어느정도 다져진 이후로는 책상 안에서만 글자를 보지 말고, 고목나무의 나뭇가지에서 서예의 장엄한 획을 찾고 흐르는 물의 움직임을 보면서 유려한 선을 보며,
리듬에 몸을 맡기는 것처럼,
마음의 움직임에 붓이 자연스럽게 춤을 출 수 있도록 하라고 하셨다.
인간이 만들어 낸 선을 고집스럽게 보지 말고,
자연이 오랜 시간 동안 지켜낸 획을 사랑하라고.
아주 천천히 그렇게 자연을 닮아가길 바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