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중 이정화 Nov 12. 2019

마음 인서트

오케이, 다음 씬은 글씨인서트!




조금만, 조금만 더 애절하게……. 오케이!



감정이 다양하다는 것은 어릴 적 매우 큰 장점이었지만,

어른이 되니 그것은 ‘어른답지 못한’ 단점이 되었다.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울고,

화가 날 때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감정이지만

그 기복의 폭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물론 모든 상황에 아이처럼 감정을 표출하는 것도

썩 좋아 보이진 않지만,

이러다가 내 감정이 사라지고

언제나 무덤덤하면 어쩌나 문득 걱정이 든 적이 있다.


특히 예술을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감정이 줄어드는 것을 그저 바라보는 것은

나의 소멸을 지켜보는 것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촬영장에서는 달랐다.


글씨를 아주 가깝게 찍는 ‘서예 인서트’ 씬에는

감독님이 바라보는 모니터 속 가득히

하얀 한지 위에 붓 끝만 서있다.


촬영장에서 감독님은 글씨의 내용보다는

현재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그의 마음 상태를 자세히 이야기해주시고, 나는 붓 끝에 감정을 싣기 위해 노력한다.    


독화살을 맞은 상황이라면 점차 굳어가는 손으로 힘겹게 쓰고, 어쩔 수 없는 헤어짐 속 무너지는 마음을 꾹 참고 있는 상황이라면 떨리는 손으로 쓰다가 감정을 주체하기 위해 붓을 잠시 멈추기도 한다. 말을 못 하는 주인공의 답답한 심경을 급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매우 빠르게 쓰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쓰는 연서는 아주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현장에서는 다양한 감정을 글씨로 표현해 내는 것이 큰 장점이었고, 누구도 그 감정을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프로답다 이야기해주었다.


특히 촬영장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감정은

현실에서는 느껴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기에

예술가는 꿈꾸는 나에게도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    




우리의 마음속 어디엔가

돌덩어리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에

‘그래도 괜찮다.’는 빛을 비춰보면

단단한 껍질을 지닌 위대한 알일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그 안에 귀하디 귀한 새가

조용히 잠을 자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mbc드라마 <구암허준>, 서예대필




맞으면 아프길 바랍니다. 아프면 아파하길 바랍니다.
그런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마음이 돌덩이와 다를 게 무얼까요.     
-유선경, 『꽃이 없어서 이것으로 대신합니다.』, 동아일보사, 2014-        





작가의 이전글 하고자 하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