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이, 다음 씬은 글씨인서트!
조금만, 조금만 더 애절하게……. 오케이!
감정이 다양하다는 것은 어릴 적 매우 큰 장점이었지만,
어른이 되니 그것은 ‘어른답지 못한’ 단점이 되었다.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울고,
화가 날 때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감정이지만
그 기복의 폭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물론 모든 상황에 아이처럼 감정을 표출하는 것도
썩 좋아 보이진 않지만,
이러다가 내 감정이 사라지고
언제나 무덤덤하면 어쩌나 문득 걱정이 든 적이 있다.
특히 예술을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감정이 줄어드는 것을 그저 바라보는 것은
나의 소멸을 지켜보는 것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촬영장에서는 달랐다.
글씨를 아주 가깝게 찍는 ‘서예 인서트’ 씬에는
감독님이 바라보는 모니터 속 가득히
하얀 한지 위에 붓 끝만 서있다.
촬영장에서 감독님은 글씨의 내용보다는
현재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그의 마음 상태를 자세히 이야기해주시고, 나는 붓 끝에 감정을 싣기 위해 노력한다.
독화살을 맞은 상황이라면 점차 굳어가는 손으로 힘겹게 쓰고, 어쩔 수 없는 헤어짐 속 무너지는 마음을 꾹 참고 있는 상황이라면 떨리는 손으로 쓰다가 감정을 주체하기 위해 붓을 잠시 멈추기도 한다. 말을 못 하는 주인공의 답답한 심경을 급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매우 빠르게 쓰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쓰는 연서는 아주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현장에서는 다양한 감정을 글씨로 표현해 내는 것이 큰 장점이었고, 누구도 그 감정을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프로답다 이야기해주었다.
특히 촬영장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감정은
현실에서는 느껴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기에
예술가는 꿈꾸는 나에게도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
우리의 마음속 어디엔가
돌덩어리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에
‘그래도 괜찮다.’는 빛을 비춰보면
단단한 껍질을 지닌 위대한 알일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그 안에 귀하디 귀한 새가
조용히 잠을 자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맞으면 아프길 바랍니다. 아프면 아파하길 바랍니다.
그런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마음이 돌덩이와 다를 게 무얼까요.
-유선경, 『꽃이 없어서 이것으로 대신합니다.』, 동아일보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