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정해진 선로를 따라 달린다. 달리는 길은 고정되어 있지만, 방향은 서로 다르다. 모두가 어긋난 선로를 달리고자 한다면 충돌은 뻔하다. 기차는 충돌을 막기 위해 멈추고 기다린다. 기관사는 신호를 기다리고 무전으로 소통을 한다. 1947년 3월 1일 4.3 사건의 발단부터 1954년 9월 21일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약 7년 7개월 시간, 어긋난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 긴 시간 동안 비극은 제주도에 내려앉았다. 다른 생각과 신념 속 어디에도 소통은 없었다.
‘4.3 평화기행’을 다녀왔다. 2박 3일 일정으로 100여 명의 철도노조 청년들과 제주 4.3 현장을 걸었다. 기억과 눈물이 스며든 곳곳을 찾아 아픔을 마음에 새겼다. 나는 어른이 되고 4.3을 알았다.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믿지 않았다. 아니, 믿어지지도 않았다. 제주에서 약 3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이다. 부상자와 행방불명, 수형자, 수용자를 더하면 무려 7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침묵의 공간을 걷는 걸음걸이마다 피가 끓어 괴로웠다. 우는 젖먹이에게 이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른들은 순수한 아이를 붙잡아 억지로 빨간색 딱지를 붙였다. 아무 죄 없는 이를 겨눈 총 끝에서, 푸른 제주가 붉게 물들었다. 아직도 “그래도 그땐 어쩔 수 없었지”라고 말하는 어른들에게 말하고 싶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죽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출발에 앞서, 우리는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을 읽고 안치환 가수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를 외워 함께 부르기로 했다. 섯알오름 집단 학살지 위령비 앞, 우리는 향을 피우고 묵념을 올린 뒤, 추모의 노래를 조용히 불렀다. 바람이 불고, 억새가 흔들리는 자리마다 노랫소리가 잔잔히 퍼져나갔다.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우리는 모슬포 ‘백손일손지지’ 묘역에도 들렀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죽어 뼈야 엉키어 하나”라는 뜻으로 섯알오름에서 집단 학살된 시신을 매장한 곳이다. 이곳 역사관 한쪽 벽면에 마련된 기억의 공간에 누군가 메모를 남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가 떠나고 쓴 글을 읽어보았다.
“그동안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기억하겠습니다...”
제주 4.3 평화공원에는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백비(白碑)’가 누워져 있었다. ‘백비’란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말한다. 제주 4.3은 아직도 올바른 이름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밝히지 못한 진실과 기록되지 않은 널브러진 시신들이 남아 있다. 얼굴을 돌리지 않고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언젠가 저 비석을 일으켜 세울 날이 올까. 우리는 작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한강 작가의 책에 나오는 대목이다. 갯것은 갯가에서 나는 해산물을 말한다. 4.3 사건으로 해변에 널브러진 시신은 파도에 쓸려 흔적도 없이 바다로 사라졌다. 지나간 자국은 산 사람을 통해 남았다. ‘곤을동 잃어버린 마을’ 해안가에서 우연히 해녀 출신 할머니를 만났다. 강경자 (80세) 해녀 할머니는 제주 무형문화재 1호 해녀 노래 전수생이다. 할머니는 해녀 노래도 알려주셨다. 노래 내용을 묻자 ‘우리 신세타령’이라고 하셨다. 해녀 할머니의 작은아버지 일가족도 4.3 피해로 목숨을 잃으셨다고 한다. 짧게 사연을 들려주셨고 길게 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더 말해 뭐해...”
‘4.3 평화기행’은 끝났다. 추억을 남기고 자리로 돌아왔다. 제주의 기억은 평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 함께 달리는 기차처럼 우리도 달려 평화라는 종착역에 닿았으면 좋겠다. 기대해 본다. 우리는 작별하지 않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