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들다”
나는 “스며들다”라는 단어가 좋다. 무언가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친숙해지는 느낌이랄까. 조금씩 속으로 배여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는다는 뜻. 내 성향과 맞는다. 대전역 광장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저 사람도 알아야 한다. 옳은 말도 억지로 요구하면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철도노조도 그랬으면 좋겠다. 노조가 조합원들 일상에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조합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다른 사람을 돕고 나누는 일에 노조가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그게 ‘조직’이고 ‘선전’이 아닐까. ‘투쟁’이라는 절박함 속에 ‘연대’라는 다정함을 챙겼으면 좋겠다. 노조가 조합원에게 스며들면 힘은 저절로 세진다.
2년 넘게 대전지방본부(대지본)에서 선전 일을 하고 있다. ‘당근마켓’을 본떠, 철도 근처에 사는 조합원들의 나눔을 실천하는 ‘철근마켓’을 만들었다. 지금은 철도 유산을 내 시선으로 소개하는 글 “내 마음대로 철도 유산 답사기”를 연재하고 있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멋지게 해내고 싶다.
“그러지 말고, 같이 다녀보는 건 어때?”
조합원들과 날짜를 정해 함께 다녀오라는 제안을 들었다. ‘이런 방법도 있구나’ 싶어 냉큼 받아들였다. 하면 잘 될 줄 알았다.
“제1회 인기있는 철도근처(철근) 탐방”
제목도 마음에 들었다. 내 이름이 ‘인기’여서 좋았다. 신청자가 몰릴 것 같아 ‘카니발 승용차 한 대로 모자라면 어쩌지’라는 고민까지 했다. 이제 숨김없이 말해야겠다. 나는 내 멋에 산다. 다른 사람 조언을 흘려듣는다. 그러다 잘못되면 이렇게 후회한다.
‘아, 내가 왜 그랬을까.’
이번 탐방은 “망했다.” 한 단어로는 부족하다.
“아주 폭삭 망했다.”
신청자는 단 한 명, 대지본 조직국장인 김호근 막내 국장뿐이었다. 스며든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침묵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우리가 다녀온 가은역 석탄처럼.
석탄은 침묵의 시간을 견딘 돌이다. 오랜 시간 동안 식물이 스며든 돌이다. 석탄은 수 천만년 전 식물이 흙 속에 묻혀 압력과 시간을 견뎠다.
“너무 기대됩니다.”
김호근 국장님이 말을 건넸다. 뭐든 좋다는 저 말을 믿을 수 없다.
‘진짜 오고 싶어서 왔을까? 친해지면 다를까?’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친해질 수 있을까.
문경 가은역은 오롯이 석탄을 나르기 위한 역이다. 가은역과 이어진 ‘은성 탄광’에서 캐낸 석탄은 가은역을 통해 산업현장으로 운반됐다. 일부는 연탄이 되어 김호근 국장님 여자친구가 있는 울산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은성 탄광’은 호근 국장님이 태어난 1994년에 폐광했다. 점심을 먹으며 호근 국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문경 사과 레모네이드’를 마셨고, 석탄박물관을 둘러봤다. 거미열차를 타고 갱도 체험도 하고, 모노레일을 타고 전망대에 올라 문경 시내와 드라마 촬영지도 봤다. 호근님과 나는 죽이 맞았다.
가은역과 문경역을 잇는 철길은 레일바이크가 운행 중이다. 호근이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아, 말 안 했던가. 호근이와 말을 놓을 정도로 친해졌다. 오미자 막걸리 덕분이다.
“형, 우리 레일바이크도 타러 가요.”
나는 손을 휘저으며 거절했다. 나는 충동보다 계획적이다. 내 계획에 평일 대낮에 남자 둘이 레일바이크를 타는 일은 없다. 그러려면 한참을 더 친해져야 한다.
호근이는 대지본 본부장 손에 이끌려 국장이 되었다고 한다. 나도 위원장 꼬임에 빠져 본 조합에서 국장까지 하고 있다. 무슨 노조가 다단계도 아니고, 카드 돌려막기 같다고 낄낄댔다. 요즘 호근이도 힘들다가, 재미있다가를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막장에 들어가 석탄박물관에서 광부들의 증언을 들었다. 새삼 부끄럽고 고마움을 느꼈다.
“힘들고, 죽고, 다치는 걸 알면서도 일하러 나가야 할 했어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죠. 그래도 먹고 살라면...”
광부는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다. 가은역 탄광에는 치열하게 사는 광부들의 시간이 녹아있었다. 호근이는 자기가 아는 그 ‘막장’이 이 ‘막장’이냐고 되물었다. 내년에 결혼을 앞두고 있다며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여기가 막장이지, 네 인생이 막장만은 아니길 바래.”
말도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때마침 밴드 알림이 울렸다. ‘철근마켓’에 댓글이 하나 달렸다.
“출발하셨나요. 다음번 시간 맞으면 저도 함께할게요.”
제1회 철근 탐방은 실패였다. 예상은 빗나갔고 계획은 틀어졌다. 다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생각대로 행동했고 아름다운 가은역을 우리 기억에 담았다. 나는 스며드는 일을 하고 싶다. 느리지만 천천히라도 가면 되지 않을까. 신청자도 한 명 늘었다. 이젠 셋 이상이다. 부족하고 어설퍼도 괜찮다. 잘 될 거다. 뒤로 가지는 않을 테니까.
https://youtu.be/7Gq4RSp1mNw?si=rxJenfj6NUIU9G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