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그리고 <초격차>

문장을 삶으로 증명한 자들의 무게.

by HEROINES

예전에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장영희 교수님이 쓰신 책입니다. 자신의 삶을 회고한 에세이집인데, 책 자체로만 놓고 보면 '별로' 였습니다. 영문학 박사신데도 문장이 거칠고 긴데다, 상당히 뻔한 얘기들이 써져 있어서 읽는 재미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구조해달라고 피리를 불었지만 구조될 가망이 없어도 끝까지 피리를 불겠다. 안 부는 것 보다 의미 있으니까” 같은 문장입니다. 요즘 이런 얘기를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하면 '꼰대'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저앉지 마"같은 문장도 있었습니다. 어쩌라고.


장영희 교수님이 누군질 알면 달라집니다. 그는 태어난 지 1년만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됐습니다. 여성이자 장애인으로 수 많은 편견에 부딪쳤지만 끊임없이 노력해 교수 자리에 까지 올랐습니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하늘이 미소라도 지어주는 게 세상 이치일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종류도 다양한 암들에 시달리며 인생의 끝까지 고생고생해야 했습니다.


여성이, 걸을 때 마다 철컹거리는 의족을 달고, 암투병을 하며 살았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마"같은 문장을 정말 아무리 힘들 때 쓰면서 삶으로 문장을 증명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성경의 달란트 비유를 떠올렸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10달란트, 5달란트, 1달란트를 나눠줬는데 얼마를 가지고 있든 그걸 써서 돈을 번 종은 칭찬해 줬는데 땅에 묻어놓은 종은 벌을 내렸다는 얘기입니다. 전 장 교수님 책을 읽고 이 비유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5달란트 밖에 없어도 장 교수님은 그것을 다 쓰고 하늘로 가셨습니다. 이 책의 문장 문장은 지난 10년간 제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반도체라면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역사나 의미 등은 약간 이해하고 있습니다. 기자 때 오래 취재했고 나름 책도 쓰면서 다시 한번 정리 했습니다.


뭐에 비유할까요. 반도체 산업이 우리나라에서 시작될 때는, 우리는 조립 TV도 잘 못만들던 때였습니다. '카피캣' 소리도 사치스럽던 시절이었습니다. 도대체 그 때 미국이나 일본이 반도체 기술에서 우리보다 몇 걸음 앞서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게 가나다를 공부하던 유치원생과 스탠포드 전자공학과 박사와의 싸움 정도로 비유하면 정확할까요.


권오현 회장은 그 때 회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3년만에 정말 한국 반도체를 세계 1위로 만들었습니다. 글이 감성적이 되면 안되겠지만, 아 정말 뭐에 비유할까요. 산업 규모로도 세계 최대급인 이 '업'을 저 동방의 소국에서 미국, 일본과 경쟁하다가 마침내 1위에 올라서는 것을. 그런 산업은, 그런 인생은 어떤 것일까요.


권오현의 <초격차>를 읽으며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떠올린 이유입니다. 이 책은 상당히 덤덤하고 뻔한 문장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역경을 극복하면 강해진다" 같은 것입니다. "누가 그걸 모르냐 이 꼰대야"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말을 한 주체는 권오현입니다. 본인이 시스템 LSI 사업부를 맡던 때를 '역경'의 시대로 묘사했는데. 5년 전만 해도 한국의 시스템 LSI가 어떤 처지인지 아는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겁니다. "메모리는 양산품이니까 만들지, 시스템 반도체 같은 창의적인 건 한국은 절대 못해"라는 한국 사람들의 비아냥을 불과 5년 전까지 들었습니다. (일단 메모리가 양산품이라는 것 부터가 잘못된 얘기인데, 이건 넘어간다 치고. 지금도 그렇게 비아냥 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도 그냥 넘어간다 치고.) 5년 전에도 그랬을 진데 십수년 전에 그 사업부를 맡았던 권오현의 심정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책의 말미에 LSI 사업부에 있을 때의 일화가 자세히 소개됩니다.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자신이 삼류 사업부에 있다 보니 후배가 자신보다 높은 자리로 왔다는 게 줄거리입니다. "후배에게 업무 보고를 해야 했던 인고의 세월은 무려 8년이나 이어졌습니다. 그 당시 저는 매일 다짐했습니다. 참자, 참을 인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을 새기며 그렇게 8년의 세월을 버텼습니다."


한번이라도 후배 밑에서 일해본 사람은 아마 이 기분을 이해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에게나 무시받는 사업부에서 후배 밑에서 8년이라니. 그리고 그걸 극복하고 현재 삼성그룹의 회장이라니. 이걸 어떻게 설명할까요.


저의 한 뛰어난 동료는 이 책 보다 조금 일찍 나온 레이 달리오의 <원칙>과 이 책을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의 말이라면 귀담아들을 만 하고, 저도 <원칙>을 보며 몇몇 문구를 마음에 새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에 계속 걸린 것은 왜 내가 헤지펀드 운영자에게 삶의 '원칙'을 배워야 하는 지였습니다. "금융위기를 예측하고 큰 돈을 벌었다"는게 그의 커리어에 가장 큰 자랑이라면 보편적으로 맞는 얘기든 아니든 그 원칙을 제 삶에 왜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답을 내리기 어려웠습니다. 이건 물론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고 제 생각입니다.


<초격차>를 안좋게 평가하는 글이 많아서 다시 한번 쉬는 날을 통해 읽었습니다. 네, '권오현'과 '반도체'에 대한 배경 지식 없이 읽으면 그냥 그런 책으로 읽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거듭 경영이 뭐고 인생이 뭔지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현재 세상이 '헬조선'이라면 이건 어려운 삶의 원리들을 몰라서가 아니라 십계명을 안지키고 있기 때문일 수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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