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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Dec 08. 2022

가슴이 울렁거리는 사람

나의 아름다운 여사님

현관문을 여는데 문이 묵직하게 열리지 않는다. 의아해서 힘껏 문을 열고 보니 올 해도 낯익은 택배박스가 눈에 띈다. 발신인이 '고 00'로 되어 있는 게 올 해도 어김없이 고여사 님이 감귤 한 박스를 보내주신 것이다.


낑낑대며 힘겹게 10킬로짜리 택배 박스를 현관 안에 들여놓고, 나는 다시 그녀의 동글하고 흰 얼굴을 생각한다. 벌써, 4년째... 코로나, 아이들 양육 등을 핑계로 나는 그녀와 그 4년 동안 차 한 잔, 밥 한 번 먹지 못했는데 1년에 감사 전화 한 통 보내는 나를 위해서 매년 감귤 한 박스를 보내주는 그녀의 한결같은 사랑 앞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동그란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 넉넉한 풍채에 희고 고운 피부를 가졌던 중년의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세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나는 결혼 후 유산으로 인해 대기업을 나와서 한동안 쉬었다가 호기롭게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이름도 생소한 베이비시터 업체 창업.


처음에는 국내 거주 외국인만 상대하다가 수요가 많아져서 점차 내국인을 상대하는데 아이를 돌봐주실 베이비시터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사업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지인들을 동원하고, 내가 직접 뛰기도 하다가, 여기저기 구인광고를 냈었다.


그때 수줍은 표정으로 나를 찾아왔던  시터분이 바로 고여사 님이었다. 당시 고여사 님은 이태원 해방촌에 살고 계셨는데 강남역 사무실까지, 나와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한 달음에 달려오셨다.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은 넉넉한 풍채의 그녀를 보고 나는 한눈에 안심이 되었다. 신앙심이 좋아서 매월 교회 단상에 꽃꽂이를 한다는 그녀는 누가 봐도 아이를 사랑하는 분이심을 느낄 수 있었다.


사업을 하는 8년 동안 그녀는 누구보다 든든한 나의 지원자가 되어 주셨다. 방송 출연을 위한 촬영이 있는 날도 시연을 위해 선발된 분은 그녀였다. 뉴스 화면에 잠깐 나오는 방송을 위해 한 나절을 촬영하느라 고생할 때도 그녀는 군소리 없이 늘 하던 대로 익숙하게 아이들과 함께 하셨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감사의 표시로 베풀어 준 건 사무실에 오실 때 가끔  건물 1층 식당에서 설렁탕을 대접한 것뿐이었다. 수년 후 그녀는 파킨슨 병에 걸린 시어머니의 간병을 위해 아쉽게도 일을 쉬셨다.


사업을 정리한 뒤, 나는 모든 시터분들과의 인연도 함께 정리했다. 전화번호도 바꾸고, 그때의 기억을 잊고 살던 나에게 약 5년 전 그녀가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깜짝 놀라 물어보니 회사를 인수하신 분께 졸라서 알아냈다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이제는 손주도 학교를 다니는 행복한 할머니가 되었다는 그녀의 안부에 우리는 함께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 그녀는 사장님이 사주셨던 따뜻한 설렁탕, 그리고 나로 인해 일을 하면서 좋은 인연들을 만나 참 감사했다며 주소를 자꾸 물었다. 회피하는 나에게 매일 전화를 걸어 묻는 그녀의 성의가 미안스러워 주소를 주었는데 그때부터 매 겨울의 초입마다 감귤 한 박스를 보내주신다.


답례로 선물 쿠폰 등을 보내드렸지만, 이후 나는 고여사 님을 직접 뵙고 식사라도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코로나에 이어 아들의 입시 등이 닥치고, 고여사 님도 일하시느라 바빠서 함께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고여사 님은 나에게 또 감귤을 보내 주셨다.  전화를 걸어 감사인사를 전하니 김장 중이라면서  

 '그거, 올해 80대 되시는 아는 권사님이 직접 농사지으신 거예요. 앞으로 얼마 더 먹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드세요. '

하시며 예의 그 호탕한 웃음을 들려주신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제주도 출신이었지.

지인이 보내주신 소중한 감귤을 나에게까지 나눠 주시는 그 사랑 앞에서  가슴속에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먹먹함을 느꼈다.


나는 그렇게 소중한 인연들을 기억하고 사랑을 베풀며 살아왔나?


박완서 작가의 단편 '시인의 꿈'에는 이 구절이 나온다.

시인의 꿈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사람과 만나는 거란다.

투박한 감귤들이 가지런히 모여 있는 박스 속을 들여다보며, 나는 조만간 그녀와 맛난 식사 약속을 잡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첫만남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우리의 겉은 많이 변했겠지만, 그녀의 여전히 투명한 미소를 본다면 나는 그때처럼 다시 행복할 것 같다~


나의 아름다운 여사님, 그녀는 나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해 주시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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