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마트에서 울다'는 많은 분들이 리뷰를 올려서 이전부터 많이 들어온 책이다. 붉은 표지에 젓가락으로 국수 가락을 집어 올린 그림의 책을 나는 수 차레 서점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읽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책 속에서 그려질 상실의 고통을 따라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해가 들면서 결심 한 것 중의 하나가 '나를 위한 책을 읽자'였다. 아이들의 수업을 위한 책을 주로 읽다 보니 스스로가 고갈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진정 읽고 싶은 책도 정기적으로 읽으며 스스로를 충전하고 싶었다.
이 책은 나를 위한 선물을 건네 듯 집어든 책 중 하나이다.
56세때 제 2의 고향인 낯선 이국땅, 미국에서 암으로 죽은 엄마. 그녀가 남긴 당시 20대 중반의 딸이 엄마와 함께 했던 추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책은 시작된다.
나는 딸이 기록한 이 책을 통해서 나와 불과 수 년 차이 나는, 이국 땅에서 고통스런 투병 끝에 가족의 곁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한 여자의 인생을 오롯이 마주했다.
현재 그룹 재패니즈 브랙퍼스트의 보컬로 활동하는 미쉘 자우너는 놀랍도록 섬세하고 정밀한 기억력으로 바로 어제 일인 듯, 엄마와의 유년시절부터 죽음 이후까지 세세하게 추억을 풀어 놓는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그녀가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한국과 서울, 그리고 외가 가족들의 모습은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들을 생경하게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제공해서 흥미로웠다.
미국인 아빠와 불같은 사랑에 빠져 불과 20대 중반의 나이에 태평양을 건너는 용기를 감행했던 그녀의 엄마는 낯선 이국에서 어린 딸을 낳아 누구보다 지극 정성으로 키운다. 그녀가 술회하는 엄마는 우리 주변의 엄마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은, 자식을 사랑하면서도 반목하고, 때로는 가슴 앓이 하면서 아픈 말도 서슴치 않는 지극히 평범하고 전형적인 엄마의 모습이다.
책에서 미쉘은 주기적으로 한국을 오가며 외가 식구들과 나눈 추억부터, 엄마와의 일상 이야기,
그리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엄마와 얼마나 많이 갈등하고 자신이 힘든 아이었는지를 솔직하고 덤덤하게 서술한다. 그녀의 엄마가 암에 걸리고 고통스런 투병을 거치면서 가족들의 이야기는 격랑을 탄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커리어와 일상을 뒤로 한 채, 엄마의 곁을 지킨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엄마가 거쳐온 모든 삶의 순간들을 세세히 기록한다.
그녀와 엄마를 이어주는 사랑의 매개체는 음식이었다. 그것도 우리가 주변에서 평범하게 마주하는 잣죽을 비롯해 만두, 찌개, 각종 김치 등의 일상 요리들. 우리가 무심하게 매일 먹는 그 요리들이 그녀에게는 엄마와 사랑을 나누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였고, 그녀는 그 요리를 통해 결국 엄마와 하나로 연대한다. 그녀에게 음식은 단순히 먹는 것 이상으로 서로의 삶을 이어주고 위로하는 따뜻한 손길이었다.
엄마의 고통스런 죽음을 목격한 이후 홀로 남겨진 그녀가 아픔을 극복하는 과정도 결국은 추억을 더듬으며 함께 나눴던 요리를 재현해 내는 것이다. 요리를 하기 위해 그녀가 자주 갔던 H마트. 그 곳에서 울컥 치미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며 카트를 끌고 장을 보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했다.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아이처럼 붉어진 얼굴로 수 차례 흐르는 눈물을 훔치느라 읽기를 멈췄다. 불과 20대 중반의 나이에 그녀가 감당했을 상실의 아픔이 나의 피부와 살갗까지 아리게 했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엄마를 잃고 일상을 살아내느라 자신의 온힘을 다한 그녀가 곁에 있다면 '정말 잘해 왔다'고 토닥여 주고 싶었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벌에 쏘이는 그 순간부터, 나란 존재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남은 평생을 벌침이 박인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벌침에 박인 느낌은 어떤 것일까? 한 권의 책을 다 읽었지만, 나는 그녀의 내면 깊숙이 생채기를 내며 자리한 그 벌침을 차마 마주할 수 없어 눈물만 삼켰다.
그녀는 엄마의 죽음 이후 음악적으로 승승장구하고, 남편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궁금해서 찾아본 유튜브에서 나는 '엄마가 나에게 선물을 주신 것같다.'고 말하는 상기된 표정을 보았다. 앳된 얼굴의 그녀가 감내했을 아픔을 생각할 때, 그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성공을 통해 엄마 모습을 보고 위로를 받았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을 덮으며 내 주변의 사랑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모두 새로워 보였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일상과 사랑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삶을 위한 진짜 귀한 선물이 아닐까?
나는 사랑은 행위이고, 본능이고, 계획하지 않은 순간들과 작은 몸짓들이 불러 일으키는 반응이며,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에 대해 이보다 더 진솔하고 경험적인 말이 있을까....친절을 베풀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