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집으로 낯선 택배가 배달이 왔다. 주문한 물건이 없는데 내 이름이 찍혀 있어서 택배 상자를 열어보니 난생처음 보는 다이슨 로고가 찍혀 있다.
내가 다이슨과 연관된 게 없는데, 무슨 물건일까?
두툼한 택배상자를 뜯어보니 요새 화제 몰이 중인 다이슨 에어랩이 나왔다. 고급스러운 상자에 담겨 있는 게 한눈에 봐도 멋진 물건으로 보였다. 물건을 받고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선물 잘 받았어?"
"네가 보낸 거야? 뭘 이렇게 비싼 걸 보내고 그래. 네 형편도 빤한데..."
동생은 웃으면서
"응. 그렇긴 한데 지난번에 호가 우리 집에 와서 자던 날, 아침에 우리 집 다이슨 에어랩을 쓰더니 우리 엄마도 이런 거 쓰면 좋겠다고 해서... 언니 생각이 났어."
동생의 명랑한 말에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엄마 드라이기를 같이 쓰던 둘째 아들 호가 그런 생각을 했구나.
"언니, 그동안 수험생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했어. 결과 상관없이 고생한 엄마를 챙겨주는 사람은 별로 없더라고.. 나라도 언니를 챙겨주고 싶어 보낸 거니 잘 쓰길 바래."
동생의 전화를 끊고 한동안 우두커니 다이슨 에어랩을 쳐다보았다.동생의 마음은 고맙지만 차마 넙죽 받아쓰기가 아까워 조만간 반품할까 생각했다.
그런데 밤늦게 집에 돌아온 둘째 아들 호가 거실의 다이슨 에어랩을 보더니 신나서 환호를 울린다.
그리고 모든 포장을 좍좍 찢어서 바로 자기 머리에 대고 써본다.
이런..... 반품은 물 건너갔다.
나보다 1년 먼저 큰 딸을 명문대학에 보낸 동생이 힘겹게 수험생 뒷바라를 하는 언니를 보며 짠한 마음으로 선물을 했나 보다. 동생이 언니의 고생을 위로하기 위해 보낸 선물 앞에서 나는 그간의 모든 고생을 보상받는 양 사랑의 온기로 가슴이 데워졌다.
매일 저녁마다 동생이 선물해 준 다이슨 에어랩으로 머리를 말리며 그 사랑을 상기하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를 주었는지 돌아본다.
오래전, TV 프로그램에서 탤런트 김수미 씨가 사람들에게 반찬을 챙겨서 전하는 모습을 보았다. 반찬을 받은 사람마다 얼굴 가득 행복한 웃음을 짓는 게 저런 표정을 본다면 반찬을 만든 보람이 있겠구나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반찬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전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부엌에 들어섰지만 머리가 진공상태가 된다.
그래, 솔직히 난 요리에 영 소질도 흥미도 없다. 우리 식구 밥 해 먹이는 것만으로도 날마다 진이 빠져서 밀키트와 반찬 가게의 도움을 수시로 받는 내가 남을 위한 반찬까지 만들다니...
엄두가 안 나서 싱크대에서 몸을 돌린다.
'안 되겠어. 나에겐 무리야. 당장 오늘 저녁 먹을거리부터 문제구만. 일단 나부터 살자.'
우리 아파트 같은 단지에 사는 J 엄마는 자신은 다른 건 몰라도 요리는 잘한다면서 친정에서 보내주는 생선이며 먹을거리로 푸짐한 반찬을 만들어 나눠주곤 한다. 그녀의 음식솜씨도 멋지지만 , 나눠줄 때의 푸근한 그녀의 미소를 보면서 나는 얼마나 행복했나.
동네 단짝인 Y 엄마는 쿠폰 같은 소소한 선물을 잘 챙겨준다. 무슨 날이거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인다 싶으면 가끔 커피 쿠폰은 물론이고 손수건 등의 선물을 슬쩍 건넨다. 단짝 친구 S는 심심할 만하면 전화를 걸어서 기분전환을 시켜주곤 한다. 전화 걸어올 때마다 이것저것 기분을 물어보고 항상 따뜻한 격려와 인사를 잊지 않는다.
그럼, 나는? 내가 사랑을 전하고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나에게도 그런 비장의 무기가 있다면...
내가 전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 상대의 마음에 쏙 드는 소소한 선물, 전화통화, 살짝 웃긴 농담 등으로 상대의 시린 마음을 녹여주고 위로를 전하려 하지만 뭔가 아쉽다.
개인적으로 요리나 반찬을 제일 해주고 싶은데 아무리 봐도 절대적인 역량 부족이다. 괜히 한다고 시도했다가 더 자괴감에 빠질 우려가 있다.
고민하는 나를 보더니 남편이 슬쩍 말을 건넨다.
"글을 써봐. 너 좋아하는 거잖아. 글로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생전 내 글을 읽지도 않고, 관심도 전혀 없던 남편의 말이어서 더 뭉클했다. 이 사람이 부족한 나에게 인정해 주는 게 하나있구나.
좋아서 끄적이는 글인데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못했다. 말보다 글은 기록도 남고, 두고두고 볼 수도 있으니 좋은 생각이다.
나 역시 생면부지의 작가가 쓴 책을 읽다가 어느 문장에 한동안 멈춰서 눈시울을 적시며 위로받았던 경험이 얼마나 많았나.
아들이 색종이에 삐뚤빼뚤 써준 편지 한 장. 수업받는 아이들이 꾹꾹 눌러써서 수줍은 표정으로 전해줬던 편지들, 남편이 교회 교육 중 과제로 써준 편지,어쩌다 기운 내라고 보내주는 하나의 톡으로도 기분이 행복모드로 전환됐지.
글로 위로를 주고, 마음을 전하는 방법을 고민해 본다.
내가 받았던 그 위로처럼 따뜻한 언어를 길어 올려서 그 사람의 하루가 그 한 줄 위로의 문장이 주는 온기로 데워지길....
글을 쓰는 대상에 애정을 지닌 이가 오래 글을 쓰고 독자의 마음속에 기억됩니다. 대상을 사랑하는 감정이야말로 힘든 순간에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힘입니다.
-정여울의 '끝까지 쓰는 용기'중에서-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써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
-김수영의 시 '책' 중에서-
읽는 순간 봄눈처럼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을 나도 써서 전해 주고 싶은데,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 부족한 나는 선물이 되는 글을 쓰고 싶어 고민만거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