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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May 10. 2022

엄마, 사라지지 마!

어버이날을 보내고

엄마가 이제 아주 낮은 언덕인데도 오르기를 숨차 하신다. 멀지 않은 길인데도 몇 번이나 숨을 가빠 하시며 쉬었다 가자 하신다.

엄마의 연세가 올해로 77세, 이제 다리에 힘이 빠지고 숨이 가빠 하신다.


어버이 날을 맞아 오랜만에 친정을 갔다.

몸이 불편한 아빠는 집에 계시고 엄마와 신랑과 막내아들 주성이와 마침 집 근처에 생긴 전망 좋다는 도넛 가게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친정집은 창신동 대로변의 주상복합 아파트이다. 오래간 살던 송파에서 교회가 가까운 시내로 이사 가길 원하셨던 엄마는 10여 년 전 정든 동네를 떠나  창신동의 대로변으로 이사 오셨다.


엄마가 사시는 동네는 옛날 서울의 정취가 그대로 많이 남아 있다. 개발이 채 되지 않은 구불구불 좁은 뒷골목 안의 오래된 집들, 아파트 창가로 보면 거대한 산을 깎아지르고 올망졸망 세워진 낡은 집들이 천연색 지붕들로 한눈에 들어온다.

그 뒤 편으로는 막 지은 새 아파트 단지들이 휘앙하게 늘어서 있다. 엄마와 우리 식구들은 어버이 날을 맞아 모처럼 개발이 되지 않은 뒷골목을 경유해  새로 생긴 도넛 가게를 가기로 했다.  가까운 곳이니 엄마는 천천히 걸어가자고 하셨다.


생각보다 도넛 가게를 가는 길은 언덕배기가 가팔랐다. 우리는 운동이라 생각하고 가뿐하게 올라가는데 엄마는 한 걸음씩 힘겹게 떼셨다. 그리고 그 걸음도 버거워 몇 번씩 쉬어가자 하신다. 예전에 엄마는 이런 적이 없었다.


늘 활기 있고, 건강하고, 어떤 때는 나보다도 걸음이 빨랐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다리가 아프다고, 숨이 가쁘다고 쉬어가자 하신다.


 그날 엄마는 이제 77세의 연세에 힘없고, 지친 표정으로 앉아 계셨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씩 쉬었다가 마침내 도넛 가게에 다다랐다.

도넛이 다 팔렸다는 말에 아쉬움을 안고 옆의 큰 건물 한 동으로 지은 멋진 카페에 갔다.

그리고 눈부신 서울의 야경을 보며 모처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엄마는 아빠가 몸이 불편해 이른 나이에 일을 그만 두시자 아빠 대신 생업에 뛰어들어 그야말로 억척스럽고 눈물겹게 사셨다.

고만고만한 연년생 터울의 딸 셋을 키우시느라  집에 계신 날이 거의 없었다. 쉬는 날도 엄마는 나가서 일하느라 늘 분주하셨다. 다행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사업을 하셨던 엄마의 그늘 밑에서 우리 딸 셋은 무사히 다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남편을 만나 엄마가 그토록 소원하시던 아들을 각각 3명, 2명, 2명씩 둔 아들 부자들이 되었다.


딸만 내리 셋을 두고 엄마는 남몰래 많은 설움을  겪으셨다. 떡대 같은 듬직한 아들 둘을 둔 큰 엄마네와 비교돼서 늘 힘들어하셨다.

할아버지는 그런 엄마에게 뭐라 하지 않으시는 좋은 분이셨지만 그 당시는 그랬다.

여자는 아들을 낳는 게 미덕인 시절이었다.


딸만 셋인 우리 집에서 당연히 엄마의 기대는 장녀인 나에게 집중됐다. 나는 엄마의 기대와 지원을 한 몸에 받고 당신의 꿈을 이뤄야 한다는 부담을 늘 안고 살았다.  


그래서 엄마의 말에 순종하고 어긋나지 않으려  애썼다. 다행히 엄마의 바람대로 나는 순조로운 길을 걸었다. 엄마는 없는 형편에도 장녀를 지원하며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해외 어학연수도 보내 주시고 마침내 장녀가 좋은 대기업에 입사했을 때는 매일 출퇴근 길을  지켜보며 격려해 주셨다.


나는 늘 엄마의 자랑이고 기쁨이었다. 내가 3년간 사귀던 남편과 29세에 결혼하기로 했을 때 ‘조금 더 있다 결혼하지’라며 아쉬워하셨던 엄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결혼하고 살면서야 나는 그때 엄마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다.  딸이 자기만의 삶을 자유롭게 좀 더 누리길 바라셨던 엄마의 마음을ᆢ


결혼 이후 유산을 하면서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었다. 회사에 사표를 쓴다고 한 날 , 밤늦은 시간에 우리 집에 찾아 오셔서 나를 만류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내가 직장을 그만두는데 왜 엄마가 이렇게까지 속상해하실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해 보니 나는 엄마의 분신이었다.

그런 내가 자랑스러운 직장을 나오는 건 당신의 꿈이 무너지는 것처럼 아프셨던 것이다.

이후 사업을 했지만 8년 만에 빚만 안고 정리했다. 사업을 정리하고 침통해 있을 때 엄마는 나에게 찾아와서 봉투에 20만 원과 나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편지를 담아 오셨다. 사업하는 동안에도 당신의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며 도와주셨는데 결국 실패한 채  마음이 무너진 딸을 염려하시는 엄마의 마음이 느껴져 한참을 그 봉투를 붙들고 울었다. 나는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늘 성공하려 애썼다. 엄마의 꿈을 내가 이루어 드리려 의무감으로 아등바등했다.

그러나 사업을 접은 이후 나는 이제 그냥 내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딸로서가 아니라 독립된 여성, 두 아들을 키우는 40을 목전에 둔 여성으로서의 내 삶을 살기로 했다.


그리고 엄마는 마침내 나를 놓아주셨다.

더 이상은 나에게 사회생활을 하길 바란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열심히 공부시키고 뒷바라지 한 큰 딸이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루는 커리어 우먼이 되길 바라셨지만 30대 후반에 셋째 아들을 가지면서

더 이상의 커리어를 이어가긴 불가능했다.  대신 친지가 운영하는 무역회사의 영어 통번역 직원으로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엄마가 그토록 원하시던 그런 유력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지만 대신 나는 엄마와 같이 희생을 수행하는 성실한 엄마가 되었다.   

  

세 아들을 키우면서 늘 분주하게 사는 나를 엄마는 늘 안쓰럽게 바라보셨다. 채 날개를 펴보지도 못하고 내가 집안에 갇혀 산다고 안타까워 하셨다. 더군다나 남편의 급작스런 실직으로 온 가족이 힘들 때 나는 엄마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 일부러 회피했다.


엄마의 자랑스러웠던 딸이 이렇게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여 드리기 싫었다.

 억지로 웃을 자신이 없어 집안으로 숨어 버렸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엄마는 서울에서 용인 우리 집까지 한달음에 달려오셔서 나에게 생활비로 쓰라고 넌지시 돈을 건네셨다. 돈봉투를 쥐고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속으로 울음을 삼키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다. 나는 더한 세월도 살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이제라도 이걸 통해 인생을 배웠다고 생각하면 된다.” 


엄마가 보태주신 돈과 내가 재택으로 회사 일을 하면서 받는 돈으로 힘겹게 몇 개월을 버텼다.

그 당시 엄마가 당신의 전부를 털어서 주신 그 돈은 우리 가족의 눈물겨운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성공하고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더라도 나는 여전히 엄마의 사랑하는 딸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예전에 느꼈던 엄마로부터의 부담과 압박으로부터  자유했다.     


나는 엄마가 고기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다. 우리에게 고기를 구워주실 때 항상 엄마는 생각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성인이 돼서 함께 식사할 때 나는 엄마가 고기를 먹음직스럽게 드시는 모습을 보았다. 지칠 때마다 삼겹살 등을 찾으시는 엄마를 보면서 엄마도 실은 고기를 아주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엄마가 명품 가방에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다.

늘 메이커 없는 가방들을 자랑스레 매고 다니시면서 명품가방이 무슨 소용이냐 하셨다.  


그런데 어제 엄마가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동생이 구찌 가방을 사줬다고... 웬일이냐고 놀라워하시는데 엄마 목소리에서 흥분과 기쁨이 느껴졌다. 엄마는 명품가방을 좋아하셨다.

단지 자신을 위해 쓰지 않으실 뿐이었다.    



일생동안 우리를 위해 고생한 엄마와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함께 몇 번 여행을 다녔다.

포천을 가고, 아이들까지 데리고 싱가포르, 베트남도 갔다. 엄마는 그동안 한 번도 걷는 것을 힘들어하거나 숨 가빠하지 않으셨다. 늘 괜찮다고 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기꺼이 모든 여정을 함께 하셨다. 불과 3년 전에도 우리는 함께 여행을 갔다. 그때도 엄마는 여전히 생기 있고 즐거워하셨다.



 그런데 어버이날 뵌 엄마는 지치고 힘겨워하셨다.

더 이상은 걷기 힘들다면서 기운 없이 앉으셨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당황스럽고 슬펐다.  


부모님이 늙어가는 걸 지켜보는 일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상이 녹아내리는 것을 보는 것만 같다. 신처럼 전지전능한 것 같던 그들이 어느 순간 내게 의지하는 존재가 된다. 자그마하게 줄어든다. 얼음이 녹듯 사라진다.’


조선일보 곽아람 기자가 어버이날 칼럼에서 한설희 작가의 '엄마 사라지지마'사진첩 책을 소개하며 귀절이다.


나의 엄마도 내 눈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바라보는 나는 마음으로 흐느낀다.

‘엄마, 사라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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