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실한 무신론자가 독실한 신앙인과 함께 산다는 것

슬픔 일기 - 오랜 침묵의 경험

by 권등대

나는 모태신앙이라고 했다. 나는 당연히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에 목사님 손 아래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세례라는 건 정말 별 거 아닌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나는 독실한 무신론자였기 때문이다. 내가 무신론자가 된 데에는 오히려 교회의 몫이 컸다. 교회에 딸린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에 유치원의 언니, 오빠들은 저보다 어린아이들을 괴롭히곤 했는데 나도 괴롭힘의 대상 중 한 명이었다. 어떤 말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듣기에 기분 나쁜 말들이 쏟아졌고 그들은 내가 손을 대는 장난감마다 빼앗아갔다. 꾹꾹 참던 어느 날 유치원에 가기 위해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 엄마에게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말했다. 엄마는 그것을 별 이유 없는 투정으로 받아들였고 나는 다시 조용히 유치원으로 향했다.


이사를 온 후 다니게 된 교회에서는 다른 종류의 괴로움이 있었다. 그곳의 아이들은 새 친구가 오면 그 친구의 얼굴과 옷차림을 확인한다. 반반하다고 판단하면 다가가서 친절하게 말을 걸고 금세 자신들의 무리에 끼워준다. 반면 반반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다. 나는 후자였다. 그러나 내가 언제나 투명 인간일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교회 행사를 위해 안무나 합창을 준비해야 할 때면 그들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며 나에게 참여를 권유했다. 최대한 많이 참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눈에 유독 못나 보이는 옷을 입고 오면 뒤에서 수군댔다. 가끔은 대놓고 무어라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 두 상황이 아니면 다시 투명 인간 상태로 돌아갔다. 차라리 쭉 투명 인간이었으면 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챙겨야 할 때만 애써 내미는 손길과 눈빛이 가증스러웠다. 교회에 온다고 나름대로 말끔하게 차려입은 옷이 한순간에 거적때기가 되는 느낌이 굴욕적이었다. 괴로워서 열심히 기도했다. 신을 진심으로 믿어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바뀌는 것은 없었고 점점 회의감만 들이찼다. 신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있다면 왜 저들까지 사랑하는 것일까. 내 고통은 신에게는 별 것 아닌 것일까. 신의 아가페가 미워졌다. 어느샌가 기도는 손깍지 사이로 빠져나갔고 성경의 글씨는 까만 거짓말로만 보였다. 그렇게 무신론자가 되었다. 애초에 나에게 종교란 주입식이었다는 점도 이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니 교회를 그만두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내가 독실한 무신론자인 만큼 엄마는 독실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학교에 하루 안 가겠다고 하면 흔쾌히 그러라고 하지만 교회를 하루 안 가겠다는 말은 거의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여러 번 아프다는 핑계를 대는 나를 보며 왜 하필 일요일에만 아프냐고 나무라던 엄마는 사실 내가 교회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묻지는 않았고 내 손을 놓아주지도 않았다. 어느 날 언니가 교회를 그만 다니겠다고 선언하고 난 뒤로 엄마는 너무 힘들어 보였다. 나는 언니가 부러운 동시에 왠지 엄마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두 시간이니 내가 참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약 서너 달간 교회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다른 길로 샜다. 아는 곳이 별로 없어서 새봤자 학교 운동장이나 동네 골목길이었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두 시간을 발을 동동 거리며 버텼다. 추운 게 교회에 가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어느 날 전도사님이 내가 너무 오래 교회에 나오지 않자 엄마에게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엄마는 나에게 당신이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냐고 소리쳤다. 언니가 교회를 안 가는 꼴만 봐도 죽고 싶은데 너는 왜 그러느냐고. 그리고 어떻게 엄마를 속이느냐고. 나는 충격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작 중학생에 불과한 나였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엄마라면 일단 이유를 물을 것 같다고. 그렇게까지 가기 싫은 이유가 있느냐고. 그리고 아무리 미워도 그렇게 추운데 어디에서 시간을 보냈던 거냐고 물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엄마는 이유를 묻지도 걱정을 해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엄마는 내가 교회에서 어떤 일을 당하고 있다고 해도 교회에 보낼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내가 포기해야 한다고.


그러나 이 무신론자는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이제 곧 성인이 될 테니 자유로워질 권리가 있다고, 열아홉의 끄트머리에 있는 나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나는 엄마에게 선언했다. 그날 엄마의 반응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이후로 이어진 긴 침묵과 괴로움만을 기억한다. 막 교정을 시작한 상태였던 나는 교정을 핑계로 밥을 점점 줄이기 시작했다. 엄마와 식탁에서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 공기가 반 공기로, 반 공기가 두 숟가락으로 줄었다. 그 시기에 허기를 느꼈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엄마의 눈을 지속적으로 피했다는 것, 엄마도 그에 익숙해져 언젠가부터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 침묵이 곧 집안의 공기였다는 것, 3주 만에 10킬로그램이 빠졌다는 것, 이후로 두어 달간 월경이 멈췄다는 것 외에는 어떠한 일상도 기억에 없다. 누구랑 연락을 했었는지, 하루 종일 무엇을 했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일체 사라지고 없다. 본래 시리도록 힘든 시기를 겪고 나서 그 시기를 다시 생각하면 힘들었다는 감정만 기억할 수 있다. 나머지는 모두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다. 슬픔이라는 감정이 이렇게 강력하다. 모든 것을 증발시키고 슬픔만 남긴다. 나의 경우엔 슬픔과 침묵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침묵은 약 5년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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