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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기록 1

슬픔 일기 - 한 우울증 환자의 토막난 일기들

by 권등대

​언젠가 이 일기를 다시 들춰볼 나에게

지금 네가 이 일기장을 편 건 청소를 하던 차에 손이 닿아서 혹은 갑자기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어서일 것이다. 들추는 순간 우울이 쏟아져 내릴 것이다. 너는 예전부터 슬픔이 아닌 것들은 기록하기 힘들어했다. 무의식적으로 피했다. 슬픔에 대해서만 주절거렸다. 슬플 때면 뭐라도 쓰거나 반대로 아무것도 쓰지 못하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날짜 사이에 큰 공백이 있다면 그 기간은 쓰지 못하는 슬픔이 있었을 것이다. 반면 이 일기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슬픔의 흔적도 보일 것이다. 두서없고 어지러울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정확한 표현을 찾지 못해 어설프게 기록되어 있는 문장도 있을 것이고 실제로 느낀 것보다 과장되거나 축소되어 표현된 문장도 있을 것이고 운 좋게도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표현해낸 문장도 있을 것이다. 너니까 다 구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쓰럽다고 느낄지 바보 같다고 느낄지 아니면 둘 다일지 모르겠으나 분명히 뭔가를 느끼긴 할 것이다.



1월 21일


청소를 했다. 침대 옆 나무 선반 위를 물티슈로 닦고 또 닦았다. 닦고 또 닦아도 검은 때가 계속 묻어 나왔다. 작정하고 더럽혔던 것도 아니고 그냥 그대로 두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더러운 걸까 싶었다. 겉보기엔 크게 더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엄마가 말했다. “원래 그래.” 어떤 물건이든지 그냥 그대로, 손을 대지 않고 있으면 먼지가 쌓이는 게 당연하다고. 먼지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때가 되는 거라고. 이래서 주기적으로 청소를 해야 하는 것인가 보다. 크게 더럽힌 일이 없어도, 그래서 겉보기엔 더럽지 않아도. 나도 그런 걸까. 별 큰일이 없고 겉보기엔 괜찮은 것 같다는 이유로 청소의 필요성도 방법도 깨닫지 못한 채 방치한 탓에 이렇게 때가 타버렸던 걸까. 청소라는 행위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은 나를 조금 후회하며 나무 선반을 계속해서 닦고 또 닦았다.



2월 10일


참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나 때문에 다들 조금씩 참고 있는 게. 나 때문에 조금씩 참고 있는 그들을 보는 나는 어금니를 문다.



2월 14일


빗방울이 차창에 하나 둘 생채기를 낸다. 곧이어 창문 위로 빗방울들이 점점이 펼쳐진다. 커다란 물방울 하나가 창에 붙었다. 바람을 타고 아래로 흐른다. 흐르면서 자잘한 물방울들을 흡수하며 몸집을 키워간다. 아픔이 이러하다. 아픔은 또 다른 작은 아픔들을 먹어가며 몸집을 키워간다. 어떤 이는 사람은 아픔과 역경을 겪으면서 강해지는 것이라 조언하지만 아픔을 먹으면 먹을수록 더 크게 아프기만 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2월 27일


내 곁에는 좋은 사람들뿐이다. 그 좋은 사람들이 좋은 눈빛과 이야기를 건네줄수록 나는 더 우울해진다.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눈물뿐이라서.



2월 28일


나에게 있어 만남이란 연극이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홀로 남은 무대는 유독 어둡다. 내내 어둡기만 했으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반짝반짝한 사람들이 와글대던 시간 후에 마주한 무대는 그 어두움과 한산함이 배가 되어 있다.



3월 3일


봄 옷을 샀다. 연한 노란빛의 티셔츠다. 살까 말까 망설이던 찰나에 이런 고민이 스쳤다. 이 티셔츠는 한창 따뜻한 봄에 입을 만한 옷인데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까. 사봤자 못 입는 건 아닐까. 그래도 샀다. 확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샀다.



3월 4일


내가 집을 나선 건 12시쯤. 엄마가 나에게 전화를 한 건 12시 35분쯤. 엄마는 전화로 내가 집을 나설 때 나의 목 부근에 긁힌 상처가 보였다며 무슨 상처냐고 물었다. 아침에 문득 간지러워서 조금 긁었더니 그렇게 된 것 같아서 그렇게 대답했다. 엄마는 잘 놀다 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엄마는 약 30분을 망설이고 걱정하다가 전화를 건 것이겠지. 혹시나 목에 난 상처가 또다시 시작된 ‘스스로 상처 내기’의 결과는 아닌지 걱정했겠지. 엄마의 예민함이 불편한 나이지만 엄마를 예민하게 만드는 건 나다. 내가 자꾸 엄마에게 불안을 선물한다.



3월 22일​


어떤 산호초는 살기 위해 자신의 내장을 꺼낸다. 내장에 있는 소화 물질로 자신의 숨을 틀어막으려는 경쟁 상대를 녹여 없애기 위함이라고 한다. 다 살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그 모습이 경이롭기도 했지만 어쩐지 보기 싫기도 했다. 징그럽다. 살기 위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제 내장까지 꺼내 보여야 하나. 모르는 생물의 냄새나는 이빨 새로 기어들어가 사이에 낀 찌꺼기들을 빼먹기까지 해야 하나. 오줌을 질질 싸며 영역표시를 해야 하나. 밤에도 잠들지 못하고 경계하고 경계받아야 하나.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가는 본능의 몸짓이 내게는 문득 이렇게 다가왔다. 징글징글하다.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새 나에게 묻고 있었다.



3월 23일


김경주의 ‘비정성시’를 읽으며 -

그런 절망을 아는가.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보지 못했던 시가 너무 쉽게 이해되는 때의 절망. 물에 떠 있는 얼음이 녹아 사라지듯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어 버릴 때의 절망. 이해가 되지 않아 답답해하며 시집을 덮어버리던 때가 행복과 가까웠던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고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절망.



5월 7일

결국 웃었던 만큼 울게 된다. 그런데 울었던 만큼 웃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내 경험은 그렇다. 언제나 웃음은 울음보다 모자라다.



6월 21일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언뜻 보면 ‘죽고 싶다’는 말에서 파생된 장난 말 같다. ‘자고 싶다’는 말을 ‘깨어있고 싶지 않다’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이 어딘가 억지스러운 듯 장난스러운 듯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 ‘죽고 싶다’는 말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진실된 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죽고 싶다’는 말을 말 그대로 해석하면 ‘죽음이라는 행위를 하고 싶다’가 된다. 밥 먹고 싶고 잠자고 싶듯이 죽음을 하고 싶다는 뜻이 된다. 능동적으로 내가 선택하고 희망하는 듯한 뉘앙스를 준다. 반면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어떠한 뉘앙스의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래서 발화자의 뜻이 정확하게 전달된다. 그저 부정적이고 수동적이다. 그래서 ‘죽고 싶다’는 말보다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 훨씬 와닿는다. 종현의 ‘혜야’라는 노래에서 살고 싶지 않아,라고 소리치는 부분이 자꾸 머릿속에 맴맴 돌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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