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바이오쇼크 인피니트 DLC : 바다의 무덤’(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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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이어지므로 위 두 글을 먼저 읽으시길 권합니다.
DLC란 ‘Downloadable content’의 줄임말로 본 게임이 끝난 후 다운로드를 통해 받을 수 있는 추가 게임 콘텐츠를 말하는데 감히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의 DLC인 ‘바다의 무덤’은 ‘Downloadable’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반드시’ 진행해야 하는, 본 게임에 속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야기다. ‘바다의 무덤’은 다른 평행 우주의 랩처 속 부커의 사설탐정 사무실에서 시작된다. 분명 본편 엔딩에서 부커가 세례식에서 사망함으로써 다른 모든 평행세계의 부커와 재커리가 사라졌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이는 차차 설명하기로 하고 일단 내용을 따라가 보자. 부커의 사무실을 찾아와 일을 맡기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엘리자베스다. 이전의 모습보다 훨씬 성숙하고 부커에게 쌀쌀맞다. 엘리자베스는 부커에게 ‘샐리’라는 여자아이를 찾아달라 의뢰한다. 샐리는 부커가 입양했다가 잃어버린 아이다. 이후 겨우 찾아낸 샐리는 리틀시스터가 되어 있었고 자꾸 환기구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샐리를 꺼내려하나 샐리의 거부로 여의치 않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보일러로 환기구에 열을 올려 샐리가 스스로 나올 수밖에 없게끔 만들자는 것이다. 부커는 위험하다고 거듭 거절하지만 방법이 없는 상황에 이내 동의하고 엘리자베스는 환기구에 열을 올린다. 샐리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여전히 부커를 거부하며 부커와 실랑이를 벌이는데, 왜인지 이 장면이 부커에게 낯익다.
부커는 그 이유를 기억해낸다. 이 평행 우주에서의 부커는 사실 ‘재커리 콤스톡’이었다. 이 평행 우주에서는 재커리 콤스톡과 다른 평행 우주의 부커와의 실랑이에서 엘리자베스의 새끼손가락이 아닌 머리가 잘려버렸고 그렇게 엘리자베스는 즉사했다. 이에 엄청난 죄책감을 느낀 재커리는 엘리자베스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로 보내달라며 물리학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재커리는 다른 평행 우주의 랩처로 넘어갔다. 그리고 재커리는 자신이 버렸던 이름인 ‘부커 드윗’을 다시 써서 사립 탑정으로서 랩처에 정착했다. 그 와중에 ‘샐리’라는 고아를 입양하지만 도박에 한 눈을 판 사이 아이를 잃어버렸다. 본편 엔딩에서 부커가 세례식에서 사망함으로써 모든 평행우주 속 부커와 재커리는 사라졌으나 이 평행우주의 랩처는 애초에 콜롬비아도, 세례식도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곳의 재커리는 부커의 세례식 사망으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이 최후의 부커 드윗을 각성시키고 처리하기 위해 이 평행우주로 넘어와 그에게 일부러 의뢰를 맡긴 것이었다. DLC 속 부커 드윗은 부커 드윗에서 재커리 콤스톡으로, 그리고 다시 재커리에서 부커 드윗으로 분하며 자신의 죄를 지속적으로 피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전의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며(자신의 부주의로 딸을 잃어버리고 고통 속에 살게 하는 일) 살았다. 모든 것을 알게 된 부커는 엘리자베스에게 뒤늦게 용서를 구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들어주지 않는다. 그리고 곧이어 부커는 드릴에 뚫려 사망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나는 듯했다. 최후의 부커 드윗까지 처리했으므로 이제 엘리자베스에게는 남은 일이 없는 듯했다. 그리하여 엘리자베스는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파리에서 여유를 즐기며 살아가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런데 아름다운 파리의 거리에 갑자기 샐리의 모습이 나타난다. 샐리를 뒤쫓아간 곳에서는 환기구에 열이 뜨겁게 오르고 있고 샐리는 그 가운데서 고통받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애초에 파리에 가지 못했다. 부커를 처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고한 샐리를 환기구 속에서 고통받게 한 것에 대한 끊임없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자 샐리는 폰테인에게 붙잡혀 있는 상황이고 폰테인은 엘리자베스에게 ‘비장의 카드’를 가져오면 샐리를 풀어주겠다고 말한다. 엘리자베스는 비장의 카드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저 샐리를 구하기 위해 그것을 찾아 헤맨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비장의 카드’를 찾아내는데 그것은 바로 ‘Would you kindly’라는 세뇌 단어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이오쇼크 시즌1’의 잭에게 걸린 세뇌이다. 왜 바이오쇼크 시즌3의 이름이 ‘Infinite’인지 명확해지는 부분이다. 다시 이야기가 시즌1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엘리자베스는 폰테인에게 잭을 이용해 랩처를 접수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어버린 셈이지만 우리는 그 끝이 배드 엔딩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문 너머를 본다. 잭과 잭이 탈출시킨 리틀시스터들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조금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가 있다.
‘바다의 무덤’의 내용과 결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선 본편에서 부커를 살해함으로써 부커로 상징되는 기성세대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부진 의지를 보였던 엘리자베스가 결국 기성세대의 잘못을 반복한 점이다. 엘리자베스는 부커를 처리하기 위해 무고한 샐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또다시 대의를 위해 무고한 이를 희생시킨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아무리 다짐하고 끊어내려 해도 인간은 똑같은 잘못을 반복한다는(여기에도 ‘Infinite’의 의미가 반영된다) 괴로운 사실을 새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결말이 씁쓸하지만은 않았던 것은 엘리자베스는 기성세대와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희생에는 크고 작음이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사실 샐리가 이용되는 과정에서 죽은 것은 아니기에 어떤 이는 희생이라고까지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어쨌든 샐리가 이용되는 과정에서 고통받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죄책감을 가진다. 그녀는 꼭 피를 흘려야만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누군가를 수단으로 이용하고 그 과정에서 고통이 발생했다면 그것이 바로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이 점에서 기성세대에 비해 훨씬 섬세하다. 또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죄를 말 그대로 목숨을 다해 반성했다. 기성세대와 달리 차원을 넘어 도망가거나 기억을 지우지려 들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기성세대와 달리 비겁하지 않다.
많은 이들이 엘리자베스는 끝끝내 행복할 수 없는 거냐며 안타까워한다. 생각해보면 엘리자베스의 삶은 참 기구했다. 태어나자마자 엄마는 죽어있었고 아빠는 술과 도박에 눈이 멀어 자신을 팔아넘겼다. 팔아넘겨진 끔찍한 도시에서 내내 탑 안에 갇혀 살았다. 그런 자신을 탑 밖으로 꺼내 준 고마운 이가 다름 아닌 자신을 버린 그 사람이자 자신을 가둔 그 사람이자 이 끔찍한 도시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좌절감은 어땠을까. 그를 제 손으로 죽여야 했을 때의 절망감은 또 어떠했을지 나는 감히 알 수 없다. 나 역시 그런 그녀를 게임 내내 지켜본 사람으로서 그녀의 해피엔딩을 누구보다도 바랐다. 그녀가 이제는 파리에서 마냥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는 이내 그녀가 선택한 엔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커를 익사시키던 그녀 손의 단호함과 혹독한 전투를 헤쳐나가던 강인함을 기억한다. 엘리자베스를 이루는 주된 요소는 기구한 과거가 아니라 그 곧은 성정과 강인한 태도다. 그러므로 연민으로 그녀를 가두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녀는 스스로 그토록 꿈꾸던 파리 대신 가시밭길을 택했다. 그 위에서 피로써 반성했다. 누군가를 피 흘리게 한 것도 아닌데 왜 피 흘리며 반성하느냐 할지도 모르지만 앞서 밝혔듯 그녀는 꼭 피를 봐야만 희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목적을 위해 수단화되어 고통받았다면 그것이 희생이라 생각한다. 엘리자베스는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엘리자베스다. 내가 엘리자베스를 사랑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오는 것이므로, 엘리자베스가 선택한 엔딩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니, 박수를 쳐야 한다. 그럼에도 자꾸 콧날이 시큰해지지만 아름다운 그녀의 엔딩을 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