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 슬픔은 맞닿아 있다

영화 ‘코미디의 왕’(마틴 스콜세지, 1982)

by 권등대

(영화 리뷰에는 항상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희란의 ‘기울어진 마음’에서 승은은 아이를 지우고 도착한 고향에서 친구의 앞에서 우는 게 아니라 되려 웃는다. 승은은 왜 눈물 대신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인지 스스로도 의아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겨울, 지하철역 구석 벤치에 앉아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언니에게 이야기하면서 나는 웃었다. 웃을만한 일이 아니라 울만한 일을 이야기하면서도 나는 웃었다. 이후 언니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막 웃었다. 내가 ‘그런 얘기하면서 왜 웃어요’,라고 하자 언니는 글쎄, 그냥 웃음이 나오네, 하고 말했다. 이렇듯 눈물을 흘리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은 상황에서 엉뚱하게 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가끔 있다. 내게 벌어진 일이 너무 커서, 순간 그게 터무니없이 느껴져서 실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등바등하고 있는 내 꼴이 잠시 우습게 느껴져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아무튼 그런 때도 있다고 생각하고 넘겼다.


한참 후 이 영화를 보다가 ‘주인공 펍킨은 왜 코미디언이 되려고 하는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단순히 유명세를 바라거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이라면 그에 걸맞은 다른 직업도 많은데도 불구하고 펍킨은 왜 하필 코미디언을 택한 것일까. 나는 그 이유가 펍킨이 가진 것이 슬픔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웃음과 슬픔은 맞닿아 있다. 너무 많이 웃다 보면 눈물이 고이는 것, 가끔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이 비슷해 보이는 것, 상대의 아픈 약점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펍킨은 이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슬픔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웃음밖에 없다는 것도 아는 것이다. 지하철역 구석 벤치에서 우리가 슬픔을 이야기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던 것도 어쩌면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그 순간 우리의 슬픔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웃음뿐이었다.


“엄마가 이 자리에 있다면 이 말을 하고 싶네요. 엄마, 여기서 뭐해요? 엄마는 9년 전에 돌아가셨잖아.”


펍킨 스스로 자랑한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는 재능’이 여실히 드러나는 스탠딩 코미디 장면에서 펍킨이 집에서 코미디 연습을 할 때면 잔소리를 퍼붓던 펍킨의 엄마는 사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음이 밝혀진다. 펍킨의 엄마는 생전에 알코올 중독자였고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학창 시절 펍킨은 아이들에게 매일 두들겨 맞는 신세였다. 펍킨은 이 비극들을 희극으로 바꾸어 말한다. 펍킨의 엄마는 차고에서 80킬로미터 속도로 달리다가 딱지를 끊긴 사람으로, 아빠는 엄마가 숙취로 구토할 때면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 구토하기 바빴던 사람으로, 학창 시절의 구타는 학교에서 구타를 정규 수업으로 넣은 탓으로. 그의 코미디에 관객들은 크게 웃고 환호하지만 영화를 보는 나는 ‘웃프다’라는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가끔 예능 프로그램을 볼 때면, 특히 신체적, 정신적으로 힘겨운 도전을 할 때나 개인사를 웃음거리로 승화하는 모습을 볼 때면 가끔 저렇게까지 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웃음과 환호가 전부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한다. 그러나 그 광경 자체가 희극이 될 수 있을까? 고통의 결과에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냥 희극일까? 환하게 웃고 떠드는 그들을 보다 보면 가끔 슬퍼지곤 하는 것, 그리고 펍킨의 스탠딩 코미디를 보며 웃을 수 없었던 것의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펍킨이 유명한 코미디언이 되어 쇼를 진행하는 모습으로 막을 내린다. 이 결말이 펍킨의 망상인 지 아닌 지는 관객 각자가 판단할 일로 남겨두었다. 나는 망상이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망상이든 아니든 슬픈 결말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펍킨이 유명한 코미디언이 되었다고 해서 과연 마냥 행복할 수 있을까? 펍킨은 자신의 슬픔에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을 보며 마냥 기쁠까? 더 큰 웃음을 위해서는 더 큰 비극의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다. 펍킨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비극을 탈탈 털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은 과연 희극일까? 펍킨의 푸근한 미소를 보면서도 나는 의문을 거둘 수 없었기에 순진하게 이 결말을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객 중 한 명이 되어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나는 나의 슬픔을 가지고 겨우 작은 글로 만들어 공유하는 일 밖에는 하지 못하는 데 반해 그는 슬픔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슬픔을 글로 바꾸는 일도 고통이지만 슬픔을 웃음으로 바꾸는 일은 말 그대로 진흙 속에서 꽃을 피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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