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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2. 2023

칼라주의

당구장에서 ~ 12

해가 뜨니 꽃들도 눈이 부셔 잠에서 깨어난다. 이슬이 마를 새라 얼른 얼굴 씻고는 저마다의 화려한 자태로 치장하고 앉았다. 다양한 빛깔과 향을 연신 뿜어대는 아름다움에 상투적인 언어가 절로 나오려 한다. 실바람에 흔들흔들 재잘거리는 모습을 나만이 즐기는 줄 알았는데 웬걸 벌들이 왱왱거리면서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다. 얼른 눈치채고 비켜주지만 잠시 맴돌더니 냅다 사라져 버리고 만다. 제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꽃은 저무는 해의 속도에 맞춰 얼굴을 살포시 감추려 든다. 일찍도 잠을 청한다. 긴 긴 밤을 뭐 하면서 지새울까. 벌들이 왜 내 품에 안기지 않았을까 고민하며 내일을 기약하겠지. 모자란 꿀을 채울 것이고, 화장을 좀 더 짙게 할 터이고, 꽃잎을 활짝 열어젖혀야겠다고 다짐할 것이다. 이도 저도 안 된다면 바람신에게나마 간절함을 바라지 싶다.


화려한 빛깔은 여성들의 미적 도구이기도 하다. 끝없는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여성들의 거침없는 욕심은 색을 품게 된다. 예쁜 꽃을 싫어하는 여성들이 없듯 누구나 꽃과 닮은 이상형을 평생토록 그려나간다. 저무는 해를 바라보는 꽃잎의 애잔함을 느껴서일까, 유혹을 만들어내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타고난 본능이자 당당한 권리겠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의 빛 녹색을 파괴하는 인간들의 단면이 비쳐오는 것은 왜일까.


고요함을 곁들여 꽃들의 향연을 바라보노라면 형언하고픈 의미를 상업 사회가 잘 · 적절히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화려한 빛깔로 만들어내는 상징이 성장의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광고판이며 상품디자인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아름다움을 과시하려 한다. 자본의 기술은 눈부실 정도다. 색 조합은 마술같이 사람들의 감정을 현혹하며 더해서 확산시키는 효과를 얻는다. 필요에 따라 눈속임도 당연하게 곁들여진다.


유혹과 용인으로 색을 품어버린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 우연히도 자본에 합류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평생토록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테다. 유년기부터 사회로 내몰려 “한 줄로 서세요.” “건널목을 지날 때는 손을 드세요.” 기술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나 당연하게 원동력의 한 축이 되어 살기 위한 과정을 밟는다. 어쩌면 너무도 당당한 자본주의 앞에서 빛깔을 품는지도 모르며 사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당구도 색을 품는다. 초기에는 자연의 색을 가져왔다. 잔디에서 시작된 공놀이를 실내로 들여옴으로써 녹색이 자연스럽게 당구대 천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파란색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천이 왜 녹색에서 파랑으로 바뀌었을까? 형광등 불빛을 흡수하여 당구공이 잘 보여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답변이 시원치 않다. 조도가 낮아도 녹색일 때 아무런 지장 없이 당구를 즐겼기 때문이다. 바뀐 지가 오래다 보니 이제는 파란색이 아니면 어색하기까지 하다. *그만큼 자본에 물들여져 있는 것은 아닐까.


꽃들이 가장 선호하는 화장 색을 꼽으라면 흰색과 노랑 그리고 빨강이다. 녹색의 품속에서 곤충들에게 가장 눈에 띌 수 있는 색상이기도 하다. 그 흔한 꽃들의 색을 닮고 싶어서일까, 당구공도 같은 색이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서인지 한국에서 최초로 태극 문양을 집어넣어 파란색을 구현해 버렸다. 유럽에서는 3인 시합을 위해서 기존의 빨간 공 대신 주황색 공을 선보이더니 파란 문양을 넣은 당구공 회사까지 출현한 상태다. 파란색이 그리도 좋을까.


자본이 가장 좋아하는 색을 꼽으라면 당연히 파란색이다. 자연에서 추출할 수 없었던 파란색의 구현을 지구에게 자랑이라도 하려 했는지 모를 일이다.  예부터 인위적으로 거창하고 숭고한 의미를 담으려는 흔적들을 모아 모아서 오늘날 ‘블루칩(blue chip)’ ‘블루오션(blue ocean)’처럼 상업 사회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다. 정치에서 정당의 색깔로 입혀지기도 하며 문학에서도 긍정의 희망을 담고 있는 모습이다. ‘블루(Blue)’속에 내포된 ‘우울함’이 자꾸만 밟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연의 빛 녹색을 파괴하는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당구공은 세속적 정체성을 지키려고 무던히도 애쓰는 모습이다. 자의든 타의든 본연의 한결같은 색상은 변함없는 익숙함이 당연시되는 당구문화다. 이어질지 무너질지는 먼 미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영원히 고유의 색을 간직하더라도 푸른 물결의 도도함에 맞서는 자연의 나약함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큐에 부딪혀서 쿠션을 맞고 튕겨버린 당구공이 몸부림치고 있다. 곧장 지네끼리 상충 작용을 일으키며 인간에게 무어라 소리치지만 언제나 공허함만 되풀이되는 것 같다.




*프로당구에서 후원사의 상징 색상을 당구 천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녹색 · 회색 · 검정 · 분홍 · 등. 네티즌들이 눈부심과 침침함에 살짝 거부감을 표현하고 있어 억지로 수용하는 흐름이다. 와중에 유럽은 회색 천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래도 파란색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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