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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0. 2023

때론 깊숙이

당구장에서 ~ 2

나무로 만든 쿠션에서 어떻게 당구를 즐겼을까. 구체가 목적지를 향해 달려간다지만 딱! 딱! 소음 때문에 흥미 유발은 힘들었을 것이다. 곡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쿠션을 이용한 게임룰이 개발되지 못한 배경은 당구대에 주머니를 만들어 버렸다. 오늘날의 포켓볼인 셈이다. 이후 나무에 헝겊을 여러 겹 덧대어 사용했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멀리 달리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엿보인다. 


*고무 쿠션이 없었더라면 당구라는 스포츠가 이렇게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을까. 통통거리며 부딪히는 울림소리에 눈 뗄 수 없는 신비한 마력, 아드레날린이 절로 충전된다. 강한 속도로 빈 쿠션을 열한 번이나 맞춰내는 현란한 힘의 향연을 감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플레이어의 기교에 맞춰 튕겨내는 오묘함은 마치 수시로 변하는 중국의 경극 가면 같은 재주를 지니는 것 같다.


오늘도 당구와 씨름하고 있다. 몸 상태가 좋거나 편안한 상대를 만난다면 건네준 질문을 수월하게 풀어낸다. 정직한 쿠션의 반응이 일어나니 기분도 좋다. 쭉 이어지면 좋겠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내몰릴 때가 더 많은 당구공. 내 팔목의 단죄를 묻기도 전에 핑곗거리를 찾기 바쁘다. 이를 두고 뭐라고 꼬집지만 초심자는 알아듣지 못한다. 단지 고수라는 이유만으로 별 의미 없는 끄떡임만 강요당하는 꼴이다. “축 늘어져 버린다.” “왁스 때문이다.” “오늘 습기가 많아서 튀어 버린다.” 궁색함도 다양하다.


쿠션을 성별로 따져본다면 여성성이 강하고 큐와 볼은 남성으로 비유해 봄직하다. 녀석은 열대야를 좋아하며 습하거나 추운 날씨에는 탄력을 잃어 유연성이 떨어진다. 한여름 밤 차가운 새벽 기운이라도 받는다면 고양이 발톱 내밀 듯 앙칼지게 굴 때도 있다. 비라도 내리면 어김없이 퉁명스럽고 어제오늘 다른 속내로 애간장을 태우기도 한다. 갈대의 변덕스러움은 언제나 남자의 마음을 헤집어놓는다. 없으면 허전하고 있으면 애물단지, 딱 그 짝이다. 


주로 수컷의 조건 없는 돌진이 녀석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린다. 눌어붙은 초크 가루가 쌓이고 쌓일 무렵이면 참다못해 한 마디를 내뱉는다. ‘꼴에 남자라고~’라며 말이다. 자존심이 팍팍 구겨지지만 어찌할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행여나 몸을 씻어주면 다소곳할까 청소기로 빨아 당기고 닦고를 반복해 보지만 딱 그때뿐이다. 달래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참을 만큼 참았음에도 한 번 더 참아본다. 끝내 천을 뜯어버리는(천갈이 작업) 행위를 함으로써 이별을 고하고 만다.


쿠션과 바닥의 대리석은 드러난 알몸이 부끄러운지 다소곳하게 앉아있다. 심통 부린 것에 대해 미안함을 표현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게 용서될 일인가. 꽉 짠 걸레로 온몸 구석구석을 비벼대며 화풀이를 해댔더니 초크 가루가 사라져 버렸다. 바닥의 대리석은 잘못을 인정하며 쥐 죽은 듯 조용한데 쿠션은 아직도 제 잘못을 모르는 눈치다. 시커먼 때 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버렸더니 땟국물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그제야 잘못했다며 용서를 빈다.


아무쪼록 녀석을 잘 다루는 것도 기술이다. 제비는 아무나 하나. 녀석을 품을 때는 샤워(당구대 청소)한 후가 가장 이상적이다. 때로는 퉁퉁거리는 당구대를 좋아하는 변태를 반기는 듯하지만 대체로 정상 체위를 선호한다. 기교는 말할 것도 없다. 수컷의 힘의 강도에 따라 반응하는 속도의 차이를 드러낸다. 대체로 강하면 싫어한다. 약하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약할 때와 강할 때를 적절히 조절할 줄 아는 현명함을 원하는 눈치다. 때론 깊숙이 때로는 짧게 뭐 이러면서 말이다. 녀석의 도도한 욕정을 어떻게 충족시켜 줘야 하나.


교본을 읽고 복습하며 또다시 봉사도 제 맘에 들지 않나 보다. 수컷에 짜증 부리는 퉁명스러움은 신이 아닌 이상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쥐어팰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완벽한 것이 어디 있겠냐며 내 사랑을 받아달라 외쳐보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오늘도 목욕재계하고 누워있는 녀석을 바라본다. 고귀한 자태와 나른한 눈빛만으로도 수컷을 홀리기에 충분한데 눈부신 태양 아래여서인지(불빛 아래) 가슴마저 두근거리게 만든다. 분명 쿵쾅 뛰는 소리를 들었을 터인데 무슨 일 있냐는 둥 언제 그랬냐는 둥 먼 산만 쳐다보고 있다. 야속한 님 이 따로 없다.




* 1839년 찰스 굿 이어 (Charles Goodyear) 가황 고무 발명. 단단한 고무의 탄생으로 산업에 혁명을 일으켰지만 빚을 지고 빈민가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고무 쿠션은 지우개가 발명되고 난 뒤 65년이 지나서야 당구대에 장착시켰다. 스리쿠션 경기의 시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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