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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알고 있는 문제지

by 당구와 인간

유년 시절 선생들이 건네주는 숙제는 뻔했다. 주로 베끼기였으니 눈감고도 풀어버릴 정도였다. 이후 찾아온 청소년기는 왜 베끼기를 건네주지 않았을까. 숙제가 과제로 둔갑하더니 문제로 서열을 구별 짓고는 우등생과 열등생이라는 계급을 본의 아니게 얻게 되었다. 시험 때만 되면 외우는 것을 기본으로 도무지 알 수 없는 답을 찾느라 헤매고 다녔다. 이런저런 참고서를 뒤적이며 끙끙거렸던 기억들. 예습과 복습이라는 자율 명령과 공부하라는 강요를 수행하기 위해 각성제를 먹으면서까지 날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당구도 똑같은 과정을 밟는다. 유년기의 숙제처럼 자세 바로잡기 · 밀고 끌어 치기 · 원 쿠션 치기 등 공을 다루기 위한 베끼기가 시작된다. 기초가 익숙해질 무렵이면 제 각 돌리기 ·뒤 돌리기 · 크게 돌리기 · 등 손쉬운 포지션을 놓고서 또 한 번 베끼기가 이어진다. 단지 학교 교육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몇 시간을 공부해도 지루하지 않다는 것. 그래서인지 각성제를 먹지 않아도 가뿐하게 햇살을 맞이할 수 있었다.


뭣이 그리도 외울 게 많던지. ‘태 · 종 · 태 · 세 · 문 · 단 · 세’ ‘수 · 금 · 지 · 화’ 까지는 이해하려 했다. 연도와 원소기호 · 수학 공식을 못 외운다고 벌 받을 때면 촌지를 찔러줘서라도 그 자리를 모면하고 싶었다. 다행히도 당구는 뇌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억지로 주입시킬 필요가 없다. 그냥 이해가 쏙쏙 된다. 반복된 훈련으로 그 순간만큼은 내 것이 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당구에서 시스템 적용은 곧 산수 시간이다. ‘오십 빼기 삼십은 이십’ 뭐 이런 유치한 놀이다. 원 팁일 때 변화 각과 투 · 쓰리 팁일 때의 변화를 눈으로 보면서 머릿속에 저장시킨다. 좀 더 나아가서는 무회전의 변화에도 적응해야 하는데 여간해서는 외우기 힘든 난해함에 지레 포기하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다. 힘의 세기에 따라 반응하는 변화도 섬세하게 달라져 버리니 그냥 난감함의 연속이 된다. 그래도 즐겁다. 벌 받을 일 없어서인지 스스로 탐구하려는 의지가 솟구친다.


기본요령을 터득하고부터 슬슬 훔쳐보기가 시작된다. 학창 시절의 커닝인 셈이다. 주위 고수들을 힐끔힐끔 쳐다본다든지 스마트폰 동영상을 유심히 관찰한다. 내 생각이 맞을까 틀렸을까. 나는 이렇게 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칠까. 키스를 어떤 방법으로 피할까. 내게로 향한 질문을 받아들여 훔치거나 배운 것을 또다시 반복하는 연습에 몰두하도록 팔에 명령한다. 무한 반복되는 베끼기의 과정은 원죄를 묻지 않는다. 많이 베낄수록 장땡이다.


비지땀을 흘리며 몰입한 대가는 당연한 성취감이다. 이는 곧 자신감으로 이어져서 무대에 오르게 된다. 지난 과정의 수고로움은 문제지를 받음으로써 학교 교육과 마찬가지로 서열정리가 완성된다. 물론 노력 여하에 따라 수시로 서열이 바뀐다. 시합은 곧 시험 치르는 시간이다. 당연히 커닝은 반칙이다. 그럴 상황이나 시간도 없을뿐더러 커닝한대도 답을 찾지 못한다. 게임당 수십 번의 문제를 상대 선수에게 던지며 나 또한 받은 문제를 시간 안에 훑어보고 풀어야 한다. 어쩌면 뻔한 질문과 답변의 연속이다.


보이는 것은 분명 유년 시절 숙제와도 같다. 단지 베끼기만 하면 되는 너무도 뻔한 답이다. 잘 알지만 풀어내기가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내가 연습했던 문제라서 자신 있게 풀어보아도 오답으로 그려진다. 이런 경우가 숱하다. 똑같은 문제를 똑같은 방법으로 틀리는가 하면 난생 겪어보지 못한 문제를 마주칠 때면 황당함까지 몰려오기도 한다. 때로는 공부하지 않은 영역인데 단지 훔쳐본 기억으로 정답을 찾을 때도 있다. 그럴 땐 물론 기분도 좋다.


주어진 조건에서 문제를 잘 풀어내는 것이 관건이다. 강한 자신감이 주위환경으로 묻히기도 한다. 아무리 쾌적해도 자신감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 없다. 지극히 단순한 문제를 풀지 못할 때면 매 순간 짧은 상처로 남는다. 연습할 때 잘 풀어내는데 실전만 닥치면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어떻게 쳐야 하는지 눈에 훤히 보이지만 좀처럼 말 듣지 않는 당구공을 한 대 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반성 구를 열심히 두들기며 화풀이를 해대나 보다.


사는 것도 답을 알고 있는 문제지와 아주 많이 닮는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안다지만 좇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풀려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변명으로 합리화시켜 화풀이로 위안 삼으려는 것은 아닌지. 단순함이 전부인 것을 사회는 모호성을 덧붙여서 난해함으로 이해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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