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라는 친구가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시합에서 패했다며 도대체 뭣 때문인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 이겨버린 선수는 비슷한 기량을 보유한 친구였다. 나와 연이 있어 물은 눈치다. 한마디로 내가 실력이 더 좋은데도 불구하고 졌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거였다. ‘이유를 알려줄까?’ 물으니 솔깃해진다. 공교롭게도 함께 쳤던 그 친구도 내게 물은 적이 있었다. 어투가 자기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인지한 느낌이어서 자신감을 가져보라며 한마디 던져준 것이 전부였다. ‘네가 낫다.’라고~
병법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지만 당구에 적용하기에 조심스럽다. 고수임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자신감이 쪼그라들기 때문이다. 이겨본 경험만으로도 자신감은 급상승한다. 상대선수가 누구인지 몰라도 자신감의 크기를 파악할 수 있다. 필요한 만큼의 힘으로 볼이 편안하게 제 길을 찾아가는 것은 안정감 있게 스트로크가 작용했다는 뜻이다. 치는 사람은 흐뭇해 하고 보는 사람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두 번째 적 구를 맞춰내는 힘 조절도 원하는 포지션이 기다리고 있을 정도다. 게임 운이 잘 따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누구나 자신감에 가득 찬 모습으로 출발하지만 매 순간 좌절감이라는 녀석이 얼굴 감추고 있다. 힘 배합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필요 이상의 힘이 넘쳐난다면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왜 주위 환경에 동요되었을까. 단지 나보다 몇 점 더 놓는 고수일뿐인데. 왜 하수의 스트로크가 고수처럼 깔끔하게 뻗어 나가는 것일까. 왜 플루크 한방에 기죽어버렸는지. 긴장감이 고스란히 쌓여만 간다. 집중력은 어디에 숨었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잘 맞춰내는 즐거움은 세상사 모든 일을 잊게 할 만큼 강력한 기쁨과 희열을 안겨준다. 이런 짜릿함이 이어지면 좋으련만, 생각대로 맞춰내지 못한다면 오묘함을 넘어 만감마저 교차한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은 물론이며 어깨마저 무거워진다. 마치 돌덩이를 얹어놓은 느낌이다. 지탱하던 팔도 조금씩 저려오니 마음마저 심란해진다. 불편한 감정들이 더해지다 보면 주체할 수 없는 긴장감으로 지레 포기하고픈 자괴감마저 들 때도 있다. 긍정의 다독임으로 맘 고쳐먹지만 이미 굳어버린 팔은 먼 산을 쳐다볼 뿐이다.
자신감이 충만하대도 꼭 좋은 결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번 이겨본다는 것이 어지간해서는 쉽지가 않다. 용기 내어 재도전해보지만 지나친 욕심이 자신감을 주저 없이 뭉개버릴 때도 있다. 기량 한 번 발휘 못하고 무릎 꿇기도 한다. 이겨야 하는 이길 수밖에 없는 운명의 승부 앞에서 욕심이 지나친 의욕으로 화를 자처해 버린 경우다. 결국 긴장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득점해야 할 상황에서 어이없이 놓쳐버렸다면 왜 이리도 미련이 남던지. 반성 당구를 열심히 쳐 보지만 쉬 가시지 않는 아쉬움은 잡생각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나 보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다람쥐 쳇바퀴도 아니고 이렇게 지겹도록 반복되는 과정을 날이면 날마다 달고 다녀야 하니 말이다. 그러면서 성숙하는 것이겠지. 경험과 경륜의 인생철학을 끌어와서 위안도 삼아 보지만 항상 그때뿐인 안도감으로 남는다.
나를 믿지 못해 빚어진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 반성의 시간을 가져본다. 당구란 내게로의 믿음을 기반으로 출발하여 고스란히 자신감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집중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패배의 원인이 되는 떨림에서 오는 긴장감을 집중력이 감춰주기 때문이다. 고조된 집중력은 자신의 감정조차 잃어버리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드러낸다. 도취된 자아의 도발적 행동으로 거침없이 상대를 제압하는 일만 남았다. ‘망아의 자신감’이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