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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4. 2023

포커페이스

당구장에서 ~ 22

테헤란로 빌딩 숲 사이를 걸을 때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예사롭지 않다. 세상 그 어떤 장애물이라도 두려움 없이 헤쳐 나갈 태세다. 표정에서 묻어나는 진중함을 보더라도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밤사이 취객들이 휘저은 술잔의 흔적들은 온데간데없다. 셀 수 없이 많은 요괴와 요정들이 잔을 들며 싸웠을 터인데. 승자가 누군지는 알 길이 없다. 매연으로 엉켜져 횡행하는 먼지들만 알고 있을 뿐.


매일같이 취객들에게 농락당하기 싫어서일까.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일요일은 검객들에게 도시를 내어주며 스산함을 즐기는 것 같다. 그들의 품속은 서슬 퍼런 진검이 감춰져 있다. 이를 눈치챈 먼지가 이내 쪼그리며 그림자를 부추기려 한다. 신사도를 앞세워서인지 적어도 도시를 농락하지는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실전 치르는 장소로 걸어갈 뿐이다. 곳곳에서(지하철 입구) 뛰쳐나오는 살벌한 발걸음은 칼의(개인큐) 무게를 더한 만큼이나 무겁고 웅장하게 느껴진다. 저마다 주위를 압도하려 애쓰는 눈치가 역력하지만 쳐다보는 이 아무도 없다.


당구가 이만큼 발전하기 전에는 규모 있는 시합이라고 해봐야 “대한당구연맹”과 “생활체육 당구연합회”에서 주최하는 대회가 전부였다. 당시 우리끼리 예기로 프로와 아마추어로 나눠진 시합이었다. 드문드문 개최되는 오픈 시합은 시장논리에 따라 당구대와 큐 만드는 회사가 후원을 도맡아왔다. 요즘처럼 큰 기업체의 지원은 감히 엄두도 못 내던 그런 시절이었다. 테헤란로 골목 한 당구장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선수가 되기 위한 입문 과정이 펼쳐졌던 것이었다.


전국에서 모여들었지만 주로 서울, 경기지역의 동호인들이 주류를 이뤘다. 이삼백 명이 참가하여 오직 일등만이 선수의 자격을 얻게 되는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던 것이다. 오픈 시합은 동호인들과 선수들이 함께 치르는 시합으로 전국에서 많게는 오백 명 정도 참가했다. 대회가 활성화되자 한 곳에 많은 인원을 수용하지 못해 강남 일대에 나눠서 치러야만 했다. 지금처럼 정확한 시간 책정이 어려워 빠른 진행을 한다지만 언제나 자정이 넘어서야 승자가 가려졌다.


거의 매 순간이 도떼기시장처럼 보였지만 나름의 엄숙함은 시합 내내 유지되었던 것 같다. 당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개개인이 몸소 실천한 보람이지 싶다. 물론 정숙함을 깨트릴 때도 있었다. 오픈 시합에서 동호인이 선수를 이겨버리는 경우였다. 명색이 선수로서 자존심이 구겨지지만 어쩔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마추어라고 방심하면 한방에 무너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플루크 한방으로 자빠진다면 남 일 같지 않은 쓰라림이 몰려오기도 한다.


그날도 오픈 시합이 한창이었다. 선수와 동호인이 붙는다며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다가가 보니 동호인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 예전에 공을 두 번이나 바꿔 치는 바람에 패했던 경험이 있던 친구였다. 뭔가에 홀려버린 기운으로 힘 한 번 쓰지 못했던 것이었다. 또박또박 볼을 다루는 모습에서 군더더기가 보이지 않았다. 자세며 스트로크가 거의 완벽했으며 첫 느낌 그대로였다. 함께 관람하던 동생에게 상대가 고생 좀 할 거라며 농담을 건넸다. 아니나 다를까 선수의 경기 운영이 매끄럽지 않다. 마지막까지 비등비등한 태세로 저울질하더니 겨우나마 자존심을 챙긴 모습이다.


실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포커페이스다. 당구에서 포커페이스란 무표정한 얼굴뿐만 아니라 걸음걸이라든지 초크 칠하는 모습도 해당된다. 비틀기와 엉성한 자세까지도 한결같다면 상대에게 충분히 위압감을 건네줄 수 있다. 잘 치는 선수끼리도 평소답지 않게 실수하거나 인상 쓰는 행위만으로도 승리의 기운을 알아챌 정도다. 월드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당구의 기량을 보는 짜릿함도 있지만 무너지는 포커페이스를 발견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건네준다.


이성의 만남이나 사회생활은 다양한 표정을 요구하지만 냉혹한 승부의 세계는 다르다. 오직 하나의 표정으로 해결이 다 된다. 긴장되더라도 평소처럼 담담하게 큐를 내밀 수 있는 내공을 다져보는 거다. 아슬아슬하게 수구가 빠져나가 득점하지 못하더라도 무표정으로 다음 타석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단순함이지만 유지시키기가 말처럼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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