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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7. 2023

냉정의 이면

당구장에서 ~34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은 어떤 새로움이 닥쳐올지. 밤새 일하느라 고생한 목구멍에 물을 살포시 적셔준다. 승강기를 타면서 설마 줄이 끊어지겠냐며 나를 다독이는 별걱정을 시작으로 쳇바퀴가 가동된다. ‘설마’의 곁에는 언제나 ‘역시나’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0.9초의 순간을 잠시나마 상상해 본다. 차를 몰면서도 골목에 누군가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일방인데 역주행을 하지 않을까. 파란불인데 위반하며 달려오는 차가 없을까. 갑자기 시동이 꺼져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지인에게 돈을 빌려야 하나, 혹시 내게 돈 부탁을 해오지 않을까, 내몰린 자영업에 내 모습이 비치지나 않을까 조심스럽다. 어쨌든 잘리지 않고 버텨야만 내 새끼를 굶기지 않는다. 옳다고 판단했지만 나도 모를 변수로 위험을 자초할 수도 있다. 어제까지 멀쩡하다가 오늘 병원에 누울 수도 있고 우연히도 새로움이 열리는 세상, 그것 참. 아무리 경계한다지만 위기와 기회의 기로에서 찰나를 가르기란 인간의 나약함이 앞서는 것 같다. 그래서 샤머니즘이 인간의 곁을 떠나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다.

 

눈떠보니 왕자요 공주가 아닌 이상 살기 위해서 이기는 공부는 필수다. 사회든 학벌이든 관계의 소중함을 설파하는 입소리에 맞춰 당연하게 일을 좇게 된다. 개개인이 또는 서로들 협력하여 옳은 소리라고 외쳐대지만 제 이익으로 점철되는 세상살이다. 행여 판단력이 흐려질세라 지식과 정보를 훔치려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어찌할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게을러서 장면이 사라진다면 돌아오지 않을뿐더러 원망할 대상도 없기 때문이다. 애써 냉정함을 감추며 온화한 척 소리 없는 칼싸움에 대비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당구도 사는 것과 많이 닮는다. 한 경기에서 많게는 수십 번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 기회만큼 위기가 찾아온다. 당연하지만 마술 같은 공식이다. 빌미를 제공함으로써 계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한순간의 실수로 또다시 빌미를 제공하고 계기를 만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인 셈이다. 실수의 복병은 언제나 앞을 가로막고 있다. 부족한 부분을 항시 채우며 장막을 헤쳐 나가야 한다. 반복된 연습의 결과물을 들고서 자신감으로 무장해 보지만 승리의 길은 갈수록 멀게만 느껴진다. 운이 따르지 않는지, 노력의 부족인지.


누가 더 잘 치고 더 많은 실수를 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는 운명의 축소판은 동점을 허용하지 않는다. 결과를 두고서 단지 울고 웃을 뿐이다. ' 더불어 · 다 같이 · 함께 · 공동 · 모두 · 참여 '라는 글귀에 어울려 옳고 그름을 배웠던 이념들은 승리를 위한 준비물에 불과했을까. 모든 난관을 헤치며 득점을 충실히 쌓은 사람이 승자가 되며 사회는 손뼉 치며 본받으라 한다. 서열이 시시때때로 정리되는 모습에서 앞선 글귀의 무색함을 지울 수가 없다.

 

욕심이 화를 초래해서인지. 노력의 부족인지. 자신감이 없어서인지. 비움을 끌어오며 마음을 다독여 본다. 승부의 세계는 감히 쉽지 않은 삶의 여정과도 같은 것 같다. 미련만을 잔뜩 안겨다 줄 뿐이다. 여정의 야속함을 인지하고 대처해 나가는 능력에서 삶의 철학을 그려내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기회와 결과를 희망으로 풀어내어 도전하는 삶 자체는 분명 아름답고 화려하다. 인정 욕구가 말년에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를 이기고 대상을 이겨야 하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놀이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존재하는 이유를 망각하고픈 승리의 장난을 당장이라도 멈추고 싶지만 그럴 용기조차 없다. 그렇다고 무참히 짓밟지는 못한다. 냉정함을 감추려는 오답을 정답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사회적 현실이 야속할 뿐이다.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최소한의 처세로 하루를 이어가고 내일을 설계할 뿐이다. 다들 그렇듯이.


그래서 당구 치는 것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냉정함을 감출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드러내야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 자비와 온화함을 최대한 감추고서 애써 냉정함을 유지하려는 진지함이다. 서로의 진지함은 긴장감을 감추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표정과 행동에서 감정이 읽힌다든지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드러낸다면 쓴잔을 마실 수밖에 없다. 구경꾼들은 긴장감을 즐기고 플레이어들은 피가 마른다.


긴장감은 때때로 샤머니즘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상대 선수의 목적구가 제 방향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실수를 바라든지 내가 원하는 표현이 아님에도 득점하길 기원하는 행위다. ‘제발’이라는 구호와 함께. 하늘신과 당구 신은 ‘혹시나’의 기운을 ‘역시나’로 바꿔버리며 토닥거리고 있다. 좀 더 노력하라고.


이제 퇴근 시간이다. 조심스럽게 방어하며 차를 몰아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승강기에 오른 후 0.9초의 순간은 잊어버렸다. 내가 오르고 있다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물론 현실은 정반대다. 샤워하면서 오늘 일을 되새기며 비누 거품에 행여 미끄러지지 않을까를 염려한 후 저녁을 먹는다. 체지방을 걱정하며 한 점 더 먹고 싶은 고깃덩어리를 제쳐두고 채소로 마무리한다. 비타민을 보충하기 위해 귤 하나를 털어 넣고는 어두워진 도심지의 산책길을 걷는다. 항상 걷는 아스팔트는 불변인데 사람들과 광고판은 언제나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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