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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7. 2023

몸부림

당구장에서 ~ 33

오늘따라 당구장에 사람들이 많다. 얼마나 기다려야 한 겜 칠 수 있을지. 휴게실 TV는 보는 사람도 없는데 당연하다는 듯 켜져 있다. 화면 앞에 리모컨이 홀로 멀뚱 거리길래 가물가물 기억을 더듬어본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리모컨이라 채널 번호를 열심히 눌러보지만 잘 찾아지지 않는다. 요즘도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 하는지. 버튼을 누르고 멈추고를 반복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던가 보다. 화면은 하이에나와 사자를 끌어오더니 리모컨 쥔 손을 슬며시 놓게 만든다.


먹잇감을 두고서 하이에나와 암사자가 서로 차지하려 으르렁거리고 있다. 일 대 일로 싸우는가 싶더니 지켜보던 하이에나 두 마리가 합세한다. 사자는 물고 있던 먹이를 뱉고는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하고 있다. 내 것이라 포효하지만 하이에나는 포기할 줄 모른다. 먹이가 치이는 와중에 덩치 큰 수사자 한 마리가 출현하자 그제야 하이에나가 줄행랑치듯 뒷걸음질 친다. 먹이를 차지한 사자는 허겁지겁 뜯고 있고 숨어있던 새끼 사자들이 슬그머니 다가가서 어미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먹어야 산다. 동물에게는 자연의 생존 법칙이 있고 인간에게는 인위적으로 구축한 생존의 터에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법칙들을 따르고 있다. 욕하면서 약자를 위협하거나 힘에 부치면 패거리들을 몰고 와서 협박을 일삼는 행위는 동물과 전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법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점이 직접적인 폭력을 억누르고 있다지만 지능화된 법을 이용하여 약자와 무지를 지배하려 든다.


쟁취한 먹거리로 근엄함을 내세우는 모습에서 온화함을 느껴야 하는지, 마냥 부러워해야만 하는 건지. 억울하게 먹잇감을 빼앗긴 하이에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험한 욕설을 퍼붓기 위해 이빨을 단련하면서 패거리들을 좀 더 끌어 모으려 할 것이다. 우선은 자기보다 약한 상대를 찾아 나서야 한다. 눈앞의 허기를 채워야 하니까.


산다는 것은 이기기 위한 과정이며 살아 있다는 것은 이겼다는 결과물로 볼 수 있다. 그 결과물을 토대로 살기 위해 이기려는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 삶, 이를 부정할 수 있을까. 졌다는 것은 죽었다는 의미다. 졌지만 잘 싸웠다는 화술에 의지하여 다음에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위안을 받아보지만 허기진 배를 언제 채울지는 기약이 없다. 눈뜨면 또다시 이기기 위한 구조로 만들어진 사회적 삶을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하이에나가 가던 길을 멈추며 먼발치 사자 무리를 힐끗 돌아다본다. 얼마나 먹고 싶을까. 특유의 투박한 걸음을 재촉하며 꼬리를 보이자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엔딩곡이 울려 퍼진다. 기지개를 켜며 당구장 주위를 둘러보니 그새 사람들이 꽉 찼다. 그러고 보니 이 공간도 이기고 지는 생존의 터였다. 저마다 이기기 위한 몸부림으로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지려고 타석에 들어서는 이 보이지 않는다.


상대 선수가 약한 상대라는 것을 간파하거나 허점이 보인다면 머뭇거림 없이 이빨을 드러내며 공격한다. 도망치지 못할 정도로 허약하다면 달래가면서 여유롭게 사냥을 즐기는 모습도 보인다. 그렇다고 마냥 당하지만 않는다. 숨겨진 반전 카드를 꺼내 들며 꿈틀거리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역전을 꾀하려 도전하고 또 도전해 보지만 패를 맞춰내는 것이 여간해서 쉽지 않다. 방심한 틈을 타 허 찔릴 경우도 발생하지만 대체로 덩치 큰 사자의 이빨을 당해내기란 역부족이다.


또 다른 테이블은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승패를 가름할 수 없다. 시간의 무자비함이 승자와 패자를 가려주겠지. 누군가는 이겨서 살아야 하고, 또 누군가는 패함과 동시에 죽어야만 하는 운명의 연속선에 놓인 우리. 머리가 복잡해진다. 타고난 ‘운’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체력’과 ‘머리’는 한순간에 바뀌지 않는다. 무의식 저장고에 숨어있던 ‘노력과 행동’을 의식으로 불러내 보아도 극복하기가 녹록지 않다. 승리와 패배라는 결과물을 두고서 인간의 섬세하리만큼 무상한 표정을 만들어갈 뿐이다. 대부분이 이기려는 신념으로 뭉쳐있기에 내가 이겨야겠다는 생각은 앞설 수 없는 두려움이기도 하다.  


소싯적 늦은 밤까지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포장마차 한 곳이 있었다. 가끔 형들 손에 이끌려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흐릿한 기억이다. 아는 것이라곤 당구밖에 없으니 분명 당구 얘기를 해 줬을 것이다. 그 대가로 어떻게 사는가를 요구했지만 지금까지 저장된 답이 없다. 포장마차는 빈 공터에 덩그러니 홀로 주위를 밝히고 있고 투영된 손님들의 그림자는 삶의 애환을 노래하고 있다. 붉은 천막에 검게 씐 ‘몸부림’이라는 상호는 바람 따라 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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