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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1. 2023

한주먹 당구실력

당구장에서 ~ 7

공공연한 장소에서 노부부의 모습이 왠지 어색하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뒤꽁무니에서 땅만 쳐다보며 따라간다. 뒤처진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할아버지가 잠시 멈추고는 같이 가자고 보채신다. 할머니는 이내 손사래를 치며 먼저 가시라네. 간격이 멀어져 얼핏 모르는 사이처럼 느껴지는 것도 잠시, 놓칠세라 할머니의 발걸음이 총총거린다. 부부의 연이 오래일수록 몸은 점차 떨어지는 것 같다. 손잡고 오순도순 살아온 세월이 아까워서 헤어지지 못하는 사랑이지 않을까.


당구와 건달도 제법 오래된 연인을 닮는다. 헤어진 듯 남남인 척 감춰진 당구문화의 현실을 뒤로한 채 공인들은 건전성을 수시로 강조해 왔다. 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지만 매체는 쉬 들춰내지 못하는 것 같다. 인연이 만들어지는 과정 때문에 사라질 수 없는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지 않을까. 언제든지 출입 가능한 영업의 특수성과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는 공식 당구 시합이 이를 증명해 준대도 과언이 아니다.


건달의 원형은 산스크리트 명 ‘간다르바(Gandharva)’를 중국어로 음역 하여 ‘건달바(乾闥婆)’가 되었다고 한다. 이를 ‘건달’이라 직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건달바는 인도 신화의 인물로서 신이 되지 못한 반신 신분이다. 곡을 연주하여 신들을 기쁘게 하였고 요정과 인간계의 여성들을 유혹하며 노니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반신의 신분은 돈 없음을 뜻하기에 돈 없이 놀고먹으면서 여자만 밝힌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건달로 비유했나 보다.


반면에 예부터 돈 잘 쓰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한량(활량)이라 불렀다. 양반들이 놀기 삼아 활쏘기를 취미삼은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로 양반계급이 몰락하자 색목문명으로 변화한 사회가 건달이라는 호칭으로 바꿔 사용한 것 같다. 이후 갱스터가 갱단으로 갱단에서 깡패로 불리게 된 시대적 배경이다.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


*왕실에서 행해지던 놀이가 상업 사회로 보급되자 불량배와 한량은 물론이며 모든 사람이 당구를 즐기게 되었다. 특히 건달들에게 당구장은 좋은 놀이터였다. 덩치를 앞세운 건달의 행태는 사회 곳곳에서 주먹으로 질서를 다져나갔다.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자 매체는 ‘기업형 건달’이라고 띄워주던 시절도 거쳐 왔다. 지구의 건달 G1과 G2는 버튼을 만지작거리면서 툭하면 약소국에 시비를 걸고 있는 세상 속에서 법보다 주먹이 앞선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유당 시절 종로 일대 당구장은 정치깡패의 출현으로 어두운 한국사를 써 내려갔다. 유지광이 당구 치다가 붙잡힌 사건을 시작으로 김두한이 똥물을 국회에 던져버리던 그 시절은 정치인도 당구장을 부담 없이 출입하였다. 당구협회 초대회장도 국회부의장이 선출될 정도였으니 초기 당구 위상은 대단했다고 볼 수 있겠다. 적어도 그 시절까지는 왕실 스포츠의 뿌리를 간직하려 했던 것 같다. 정치깡패 또한 단순한 깡패 수준이 아닌 의적 형태의 건달로 비친 모습이다.  


부정선거와 학생의거를 거쳐 온 격동의 시절은 자유당을 와해시켜 버렸다. 정치깡패가 사라지자 범법자들이 본격적으로 당구장을 점령하면서부터 부정적 이미지를 공공연히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강점기 시절부터 당구공 절도 사건을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크고 작은 범법행위가 끊이지 않았다. 공짜 당구를 치면서 자릿세를 뜯는 것은 부업이요 해가 지면 본업에 충실했으리라. 이후 법치의 창조물 조폭이라는 단어를 정치가 권력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버렸다. 이를 영화 자본이 활용하면서 상업적 이익을 도모하게 된 시대적 흐름이다.


적어도 19세기말까지 조폭이라는 단어가 건재했다. 20세기를 여는 그 순간까지도 폭력을 소재로 한 영화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우리의 뇌리를 당연하게 스쳐 지나갔다. 욕설 없는 영화는 관중몰이를 하지 못했던지 비속어를 무작위로 남발해 버린 어른들의 무책임함은 오늘날까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청소년들의 저속한 욕설은 당연한 언어 사용의 권리가 되었으며 언론 감시에서 벗어난 온라인 매체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예나 지금이나 당구장의 영업형태는 백수들을 많이 받아야만 유지된다. 지역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오전부터 늦은 밤까지 당구공 소리가 이어진다. 유흥상권의 경우 밤새도록 영업하는 곳도 더러 있다. 오래전 통행금지 시절은 간판 불이 꺼진 당구장에서 날밤 새는 일도 허다했다. 내기 당구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이를 ‘생활 당구’라 칭했다. 요즘은 생활 정치로 응용되는 것 같다.


정상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아침에 출근해서 퇴근 후 당구장을 찾게 된다. 이런 손님들만 상대한다면 높은 임대료 때문에 망할 확률이 높다. 낮 시간대 손님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방법은 생존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상술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범법자들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 대해서는 의견의 여지가 없지 싶다. 아울러 부정적 결과물로 팔려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세월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적어도 지난 시절은 그랬다. 묵은 당구 밥은 건달과의 인연을 유달리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 1912년 3월 일본 당구 재료 판매상 닛쇼 테이(日勝亭)에 당구대 2대를 주문. 창덕궁의 인정전 동행각에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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