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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5. 2023

S라인

당구장에서 ~ 28

“당구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스포츠다.” 예나 지금이나 공인들의 홍보는 한결같다. 막상 출입해 보면 여자와 아이들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말이다. 남자들만의 공간이래도 어색하않은 당구장. 이런 고추밭에 간혹 나비가 날아든다. 대부분 남자 친구 손에 이끌려 문을 두드리게 된다. 당연히 연인들끼리 가르쳐주면서 즐기려나 싶었지만 혼자라고 한다. 함께 칠 사람을 붙여달라는 소리다. 나비를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혀두고는 낯선 사람과 진지하게 시합을 치르고 있다.


당구장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투자하거나 여러 군데 둘러볼 정도의 편안한 구력이라면 청춘의 당구장 장난을 한 번쯤 지켜보았으리라. 굳이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남자는 고수 축에 끼지 못하는 고만고만한 실력이라는 것이다. 왜 함께 치지도 않으면서 여자 친구를 데려왔을까.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고픈 나비의 호기심이 졸라대진 않았을 터인데. 아무튼 나비들 대부분 예뻤던 기억이다. 아니면 몸매가 ‘에스라인’ 이거나.


나비는 당구장이 처음이다. 시선이 한 곳에 멈추지 않고 정신없이 좌우 또는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다. 남자 친구의 수구가 적구를 잘 맞추는지 잘못 맞추는지는 애초부터 관심 없다는 표정이다. 주인아저씨가 음료를 건네주는 다정함도 건성으로 대답한 체 그저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바쁘다. 그 모습을 의식해서인지 남자는 ‘삑’ 소리를 내며 큐미스를 해버린다. 동시에 무안한 표정으로 나비를 쳐다본다.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못내 남자 친구가 원한다는 것을 직감한 반응이다. 큐 미스가 뭔지 득점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기나 할까.


나비의 날갯짓이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고추밭의 고추가 빨갛게 익어서인지 풋고추여서인지는 알 길이 없다. 애써 불편함을 감추며 음료를 마시는 둥 마는 둥 주위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뭇 남성들의 눈빛이 마주칠 때면 삽시간에 외면해 버리며 남자 친구를 바라보는 척한다. 임자 있는 몸이란 뜻인지도 모른다. 혹시 놓쳐버린 표정이 있을까 조심스럽다. 나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고수한 채 다소곳함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주위는 당구공 소리가 요란하다. 예민하게 귀 기울이면 짧은 순간 수시로 소리가 멈추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때는 남성들의 곁눈질이 정신없이 오가는 순간이다. 슬쩍 곁눈질하는 무의식 행동이 정적으로 느껴진다. 주파수 교란 시간은 길어봐야 30분이다. 잘생긴 남자라도 있다면 시간을 좀 더 할애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엉덩이를 들썩이는 모습에서 주위 파악이 끝났다는 신호를 엿볼 수 있다. 남자 친구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며 그만 치고 빨리 가자고 한다. 알았다는 시늉을 하지만 조급함에 쉽게 끝날 리 없다. 나비의 인상이 조금씩 구겨지기 시작한다. 애꿎은 의자만 고생이다.


주인장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연인들은 그냥 딱 한게임이 전부다. 당구대에 먼지만 묻혀놓고 가는 꼴이다. 그래서 뒤통수가 근지러웠던가 보다. 어릴 적 내게도 이런 경험이 푸릇하다. 연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지 우쭐한 이백 점대 당력이 가장 먼저 실행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서울 명동에서의 어느 여름날 그날따라 여자 친구가 곁에 없었다. 몸매와 얼굴이 예쁜 두 살 많은 누나가 있었다. 서로 친한 사이여서 부담 없이 당구장에 놀러 가자고 했다. 호기심을 보이며 좋아한다. 왜 하필 그때 당구 생각이 났을까.


경험치는 행동의 여유로움을 보이듯 주인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함께 칠 사람 없냐고. 상대가 누군지 몇 점인지는 기억에도 없다. 초구가 정해지고 당구공 소리가 나면서부터 승리의 활기를 띠는 척한다. 관심은 오로지 누나의 표정이다. 역시나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날따라 송신기도 많았다. 제각각 주파수를 맞추더니 요란해지기 시작한다. 누나의 정신없는 표정에서 교란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음료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잠잠해지는 틈을 타 맛있다며 권유해 보아도 입에 대는 척할 뿐 눈빛은 저 멀리에 있는 것 같았다.

 

어김없이 30분의 시간이 흐르자 삐꺽 소리가 난다. 발신기가 제대로 작동했는지 전파 전달이 제대로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점수판을 쳐다보니 알 수가 몇 개 남지 않았다. 옆구리 공격이 들어오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겠지. 누나는 왜 나랑 치지 않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가르쳐달라고도 않는다. 단지 구경꾼으로 데려갔을 뿐인데 나름 기분이 좋았나 보다. 여자 친구에게 자랑까지 하네.


“나 당구장 가 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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