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함, 내 본능이 보내는 가장 강력한 신호
같은 공간에서 함께 웃고 있지만 묘하게 불편한 사람이 있다. 웃는 표정 뒤에 따라오는 말투, 눈빛, 태도에서 설명하기 힘든 기류를 느낄 때 우리는 종종 '쎄하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단순한 기분 탓이라 치부하지만, 쎄함은 결코 가볍지 않다. 나이와 경험이 쌓일수록 이 감각은 오히려 정밀해진다.
쎄함은 상대가 '나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최소한 내 기준에서 경계를 두라는 신호일 뿐이다. 세상에는 나와 잘 맞는 사람과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나에겐 불편한 사람이어도, 누군가에겐 좋은 인연일 수 있다. 결국 쎄함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궁합과 효율의 문제다.
젊을 때는 직감에 확신이 없어 '내가 예민한 건 아닐까'를 고민했다면, 지금은 내 자신을 먼저 믿는다. 쓰렸던 뒷통수의 기억은 경험으로 차곡히 쌓여 지금의 내게 사람 보는 눈을 키워줬다. 그렇기에 나는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불편한 위화감을 절대 무시하지 않는 편이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퇴사 후 얼마 뒤, 거리를 두게 된 동료에게서 장문의 카톡이 왔다. 겉으로는 아쉬움과 위로로 포장됐지만, 나는 그 안에 불편한 기류를 읽었다. 그래서 감정을 거두고 사실만을 짚어 답했다. 겉으로 미안한 척하는 이와 진짜 미안한 사람의 반응이 다르다는 것쯤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내 답변 이후 그의 반응에서 변화가 느껴졌다. 말투가 달라지고 회신이 늦어졌다. 거기에 빠른 자기 방어와 논점을 흐리는 무의미한 답변이 이어졌다. 상대의 안녕을 바라는 성숙한 끝인사를 나눴지만, 그날 나는 차단 당했다.
한 때 가까웠던 그와 멀어진 이유는 단순했다. 속셈이 보이는 쎄함이 세 번 반복됐기 때문이다. 나를 이용하려 했고, 자기 패만 감췄고, 내 앞에서만 센 척했다. 나는 계산적인 관계를 지양하지만, 쎄함이 세 번 쌓이면 관계를 정리한다. 이유는 휘둘리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내 마음이 피곤해서다.
삶의 에너지는 한정돼 있다. 내 삶에 집중하기도 벅찬데, 굳이 불편한 상대를 붙잡고 애쓰는 건 손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더 이상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 선택지는 언제나 단순하다. 잘 맞으면 길게 보고, 안 맞으면 걸러낸다.
쓰리아웃 체인지. 삼진아웃된 관계에 자비란 없다. 빠르게 로그아웃시키는 게 현명하다. 물론 내 판단이 항상 맞는 건 아니다. 하지만 틀릴 확률보다 맞을 확률이 높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번 일은 경험에 확신을 더하는 계기가 됐다. 쎄함은 감정적인 편견이 아니라, 겉과 속이 어긋난 순간에 본능이 먼저 캐치하는 불편함이라는 것을 말이다.
당신이 느끼는 그 감각을 믿어라.
그것은 본능이 보내는 경고일 테니까.
'왜 자꾸 그 사람이 불편할까' 라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그 사람과 맞지 않을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