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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시간의 절대 종속변수다

by Plato Won
Plato Won 作,2022년 10월 14일 여명은 질문을 던진다
Plato Won 作,희망을 노래하는 여명의 시간은 짧다.인생의 소중한 순간도 그렇다


"철학이란 질문을 던지는 것"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한 정의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을 전혀 낯선 곳으로

밀어 넣으면서 질문을 쏟아내며 철학을 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익히 아는 '존재하기'에 대해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지 질문을 던지며

<존재와 시간>이라는 역작을 만들어 냈다.


하이데거에게서 익숙한 '세계'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공간이 아니다.

각자 어떤 목적을 갖느냐에 따라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각자의 세계가 다 다르다고 정의한다.


세계 안에 존재하는 존재자,

망치는 목수에게는 집을 짓기 위해 나와 관련된 존재자이고,폭력배에게는 폭력은 자신과

관련된 존재자이다.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존재자는

나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전혀 성질이 다른 존재자가 되는 것이고,

그런 측면에서 세상은 내 손 안에 존재하는

세상,즉 나의 의지의 발현인 것이다.


이 세계에서 현존재, '거기에 머물러 있는 인간'은

타인과 동떨어지는 세계에서 사는 것이 두려워, 일상생활에서 자기 자신으로 있지 못하고

스스로를 타인과 평준화 시켜버리는

그런 인간을 말한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거기에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들'인 것이다.


"그들은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아니고,

사람들 자신도 아니며, 몇몇 사람들도 아니고,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말도 아니다.

그들은 불특정 다수의 그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모든 판단과

결정을 '그들'의 뜻에 따라 내리기 때문에

'그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그들' 속으로

쉽게 숨어버린다.


"모두가 타인이며,어느 누구도 그 자신이 아니다.

'일상적인 현존재의 주체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인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이 '아무도 아닌 사람'사이에 모든

현존재가 서로 섞여 있으면서

그때마다 자기를 드러내고 숨기는 것이다."


인간은 일상적으로 잡담과 호기심,애매함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이해하고 해석한 대로,

'그들'을 쫓아서 '그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아간다.


그러면서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결정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우리가 이런 착각 속에서

빠져나올 때만,그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가 지칭하는'현존재'는 거기에 자기 뜻과 상관없이 그저 내던져진 존재,즉 우리들을 말한다.


이렇게 세상에 내던져진 상태에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의 삶은 시작된다.


"죽음이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극단적이며, 다른 가능성들이 뛰어넘을 수

없는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기에 충분할 만큼 늙어 있다고 말하며,

인간의 죽음은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떠안을 수밖에 없는 존재방식이라 하였다.


죽음을 재촉하는 길은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지 못하면서 시간을 죽이면서 사는 삶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가 그의 저서를 <존재와 시간>이라고

정한 이유도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

정의함으로써 '인간이 시간적인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는 영구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함수에 따라 각자 다른 세계에서,

다른 존재방식을 갖는다.


지금까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 서양철학이

시간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찾아 헤매었다면,

하이데거는 이런 보편적인 본질은 없고,

다만 개별적으로 시간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간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과거, 현재, 미래의 일률적 시간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시간에 대한 구조를 분석하면

"있어 오면서(과거),마주하면서(현재),

다가감(미래)"으로 설명한다.


지금까지 있어 온 시간이 있기에

현재의 마주하는 시간이 있고,

다가올 미래가 있기에 현재의 마주함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인간의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시간은 가변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에게 '실존하는 것'이란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사는 것만이 실존하는 삶이고 본래의 삶이며,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죽음을 향해 앞서

달려가 봐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향해 앞서 달려가 보라는 것'은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도망가지 말고

죽음이 언제든 닥쳐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내면에서 들여오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지만, 그 존재방식은

스스로 부딪혀 결정하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므로 '그들'로 살지 말고

내면의 양심의 소리에 따라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의 존재가 유한한 시간성을 가진 것을 깨닫고 죽음을 향해 앞서 달려가 보면

내가 아닌 '그들'로 살아가면서 소중한 시간을 죽여버리는 憂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철학함'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지금 당신이 존재하는 방식이 당신의 내면의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게 맞는가?"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통해

시간의 유한성을 깨닫고

자신의 존재방식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음을 넌저시 암시하고 있다.


존재는 시간의 절대 종속변수이므로

지금 이 시간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Plato Won


2022년 10월 14일 새벽녘 사유는

새벽길을 운전하면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에 대해,2CELLOS의 Thunderstruck,

벼락 맞은 듯한 격정적 연주를 들으며

사유해 보려한다. 사유의 결과값은 내일 글에서


Plato Won 作,2022년 10월 14일 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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