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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ato Won Apr 21. 2019

싸울 때는 철학을 옆구리에 끼고 싸워라

철학은 개인 차원에서는 윤리학이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정치학이다.

Plato Won 作,자전거는 좌우균형이 맞아야 앞으로 나아간다.사회도 정의도 그렇다.
내면을 성찰하고 사회 내의 불의를 세밀히 살펴볼 수 있는 망원경, 그것이 철학 아니겠는가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한 삶이다.

이를 위해 정의로움이 필요하다.


정의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뭉치며 살다 보니 이런저런 일들로

시도 때도 없이 싸우고 또 싸운다.


정의와 불의가 싸우고,

콩나물 가격으로 싸우고,

너 잘 났네, 내 잘 났네 하고 싸우고

보수와 진보랍시고 싸우고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식이,

싸우고 또 싸운다.


이런 싸움에 머리 내 밀고

끼어드는 것이 정의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뭉친다.


뭉치는 건 좋은데 어찌 되었건

두 사람만 모여도 지배, 피지배 관계가

알게 모르게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자연히 서로 간의 권리, 의무관계가 발생하고

지배, 피지배 간의 분배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합리적으로 조율하지 않으면

다툼이 발생하고 커지면 전쟁이 벌어진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싸움의 역사, 전쟁의 역사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행복은 멀어진다.

따라서 철학은 정의를 주요한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개인 차원의 올바름을 다루는 것이 윤리학이라면

국가 차원의 올바름을 다루는 것이 정치학이다.

서양의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었으나 이미 소크라테스, 플라톤에 의해

철학의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삼아 왔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악은 知 때문이라고 보았고,
철학의 목표는 아레떼(arete), 德를

목표로 한다고 하였다.


德이 있는 자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으로,

지혜와 행복과 은 삼위일체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들에게 편지 형식으로 쓴 최초의 윤리학 책인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을 통해 

이 행복이고 그것은 바로 영혼의 활동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德에는

예지적 과 윤리적  있는데,

예지적 은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윤리적 은 습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德은 목적일까? 수단일까?
윤리학설은 을 목적으로 보느냐

혹은 수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나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목적, 즉 행복에 대한

수단으로 보는 입장을 취했다.


플라톤은

정의란 그 자체로서도 좋고 

수단으로써도 좋다고 하였다.

윤리학은

일반적인 인간의 행위에 관한

여러 문제와  규범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소크라테스 이후 고대 철학의 주제는 

윤리학의 근본 문제인 최고의  밝히는 것으로,

최고의  궁극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정의를 국가차원에서 다루는 학문이 정치학이다.

정치학이란 사회 과학의 한 분야로 정치 또는

정치 현상을 그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필연적으로

공동체를 이루어 인간 간의 관계를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무한한 욕망에 비해

자원은 상대적으로 유한한 것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연과 싸움,

인간과의 싸움,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을 지속한다.


15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인간 간의 관계를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했다.

물론 인간사회는

이러한 대립과 투쟁 관계에서 조정 역할을 함으로써

질서의 안정을 찾고자 했으며

여기서 바로 '질서의 조직화'인 정치가 발생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정치학에서

"정치 공동체인 폴리스(Polis)

바깥에 있는 존재는 神이거나 야수임에 분명하다"

라고 말하면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그 천성이 정치적이라고 말해

인간 사회에서 정치의 불가피성을 일찍이 

간파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란

어떤 비정치적인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 사회는 '사회가 있는 곳에 정치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란 결국

희소자원의 권위적인 배분을 둘러싼 활동이다.

이의 처리 과정에서 사회를 통합,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활동이 바로 정치활동인 것이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루소는

 정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자유국가의 한 시민으로서

투표할 권리가 있는 이상, 아무리 그 영향력이

미미하더라도 정치를 연구할 의무가 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윤리와 정치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내면의 규율인 윤리와 사회적 규율인 정치가

보편 타당성을 지니고 공동체 이익에 부합할 때,

또 이를 잘 지켜나갈 때 우리는 공동체 내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악덕은 무지의 소산이라 했으니,

정의롭지 못한 개인이나 정의롭지 못한 국가는

결국 을 재촉한다는 지혜가 없다면 우리에게

행복은 요원한 일이 된다.


결국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철학이 늘 우리 곁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왜?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니,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싸울 리가 있겠는가?


싸운다 하더라도

양심의 테두리 내에서 싸울 것이고

 되면 법의 테두리 내에서 싸우고

또 그 결과에 승복하지 않겠는가?


철학이 왜 삶의 무기가 되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철학은 망원경이다.


내면을 성찰하고 사회 내의 불의를 세밀히 성찰할 수

있는 망원경, 그것이 철학 아니겠는가?


아주 가까이 있는 내 내면을 현미경이 아닌

멀리 내다보는 망원경으로 봐야 할 만큼,

나의 내면을 저 우주 밖에 내다 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철학이라는 망원경이

삶의 무기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철학이 삶의 무기가 되는 이유를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혹시 싸울 일이 있으면 철학책을

옆구리에 끼고 싸워라.그래야 제대로 이기든

제대로 승복하든 둘 중 하나는 한다.

적어도 억지는 안 부리게 된다.


Plato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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