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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ato Won Aug 11. 2019

오만함 대신 겸손함이, 게으름 대신 꾸준함이 깃들 때

그리스 비극에서 주인공이 저지르는 치명적 실수를 벗어날 수 있다.

그리스 남부 어느 섬마을에서 조우한 소크라테스

인간이 본연의 위치와 임무를 망각할 때

그는 치명적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다 아는 그 치명적인 실수를 안타깝게도 그는 그가 무엇을 잘못하는지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리스 비극에서 주인공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한다.

그는 사건과 사람들을, 비극을 관람하는 관객처럼 객관적으로 관조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주인공의 그런 마음을 '오만'이라고 부른다.

오만은 주인공의 위치와 주인공이 가야만 하는

길을  어둡게 하기 때문에 주인공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한없이 헤맨다.

오만한 자는 자신의 이익에 눈이 멀어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장님이 된다.

주인공은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자초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관람객들은 다 아는

그 사실을 비극의 주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관객들은 그것을 즐기고 또 반성하고 교훈으로

삼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는 

비극 주인공의 치명적 실수를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불렀다.

하마르티아의 원래 의미는 '과녁 빗나가기'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말이다.

궁수가 과녁을 빗나가는 것이 치명적 실수인 것이다.

군주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못하는 것,

그것이 치명적 실수다.


궁수가 화살로 과녁을 명중시키지 못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과녁의 존재를 알지 못하거나 혹은

그 존재를 인식하더라도 활쏘기 연습을 게을리해

화실을 과녁 안으로 보내지 못하는 경우다.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주인공은 그 사회의 리더다.

리더가 하마르티아,  과녁 빗나가기라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자신의 이익 만을 좇는 오만함 때문이다.

위험을 모르는 장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비극을 보는 관객은

그 주인공의 치명적 실수를 안다.

그러나 말을 전할 수 없다.

그저 안타깝게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


국가에서 권력층이 자신들의 이익 만을 좇는

오만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를 때, 

시민들은 그저 탄식만 하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그리스 비극의 관객이 될 수밖에 다.

권력층이 겨누어야 하는 과녁이 어딘지를 모르는
것이다. 과녁을 알고 있어도 오만함으로 활쏘기
연습을 게을리해서 과녁을 맞히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치명적인 실수는

국가의 치명적인 실패를 부른다.


군주 위험을 모르는 장님이 되는 것이고

시민들은 눈 떠고 당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군주의 자리는 겨누어야 하는 과녁이 어디인지
정확히 꿰뚫고 있어야 한다. 

겸손함으로 피나는 훈련을 통해

과녁을  명중하는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군주는 그런 자리다.
좌표가 어딘지 통찰력도 있어야 하고,

꾸준함과 부지런함도 갖추어야 하는 자리가

군주자리다.


오만함 대신 겸손함이,

불의 대신 정의가

황금  대신 가치가 최우선인 국가는

언제나, 늘, 항상 뜻한 바를 이룬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 범하는 치명적인 실수는

오만함과 불의, 게으름으로부터 다가온다.




Plato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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