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엄마와 아빠가 집에 와줘서 딸이 좋아하는 팬케이크를 함께 구워 먹었다. 딸은 루틴이 중요하고 고지식한 편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많아서 예전에 실패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집착이 크다. 아프기 전, 아내는 종종 주말 아침에 팬케이크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딸에게 팬케이크는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상징했다. 물론 여느 때와 다름없는 주말 아침이라고 생각해서 팬케이크를 요청했을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팬케이크를 먹으며 엄마를 떠올렸을 것이다.
아침을 먹은 나는 같은 동에 사는 딸의 친구인 S네를 방문했다. 우리 가족과 원래 어제저녁에 만나기로 했으나 아내가 입원해서 어렵게 잡은 약속을 취소해야만 했다. 어젯밤에 딸을 재우고 찬공기를 쐬러 잠깐 산책을 하고 올라오는 길에 우연히 S의 동생을 유아차에 태워서 올라가는 S엄마를 만났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뒤에서 불러서 인사를 했다. 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고 아무 생각 없이 불렀기에 그 이후의 리액션에 대한 기대도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S엄마는 내 목소리를 듣고 돌아서더니 잠시 곤란하다는 눈치의 몸동작들을 보이고 이내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몸동작이나 격해진 감정을 보면 저녁에 먹은 술기운이 올라온 것 같았지만, 진심인 것은 틀림없었다.
아파트 1층의 엘리베이터 앞까지 S엄마와 동생을 겨우겨우 이끌고 갔으나, S엄마의 울음은 그칠 생각이 없었다. 빨리 집에 들여보내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엘리베이터를 불렀다. 울고 있는 S엄마와 걱정 가득한 토끼 눈을 하고 있는 동생을 엘리베이터에 겨우 태웠더니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가족이 우리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년 전에 층간 소음 분쟁으로 다툼이 있었던 아랫집 사람들이었다. 아랫집 사람들은 나와 아내의 얼굴을 모두 아는데, 내가 별안간 울고 있는 외간 여자를 달래고 있으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당황하는 눈치였다. 우리 아파트로 이사 온 이후로 가장 난처했다.
나는 어찌어찌 울고 있는 S엄마와 이제 울음 대열에 합류한 동생을 데리고 함께 내렸다. 그제야 아랫집 사람들과 나는 눈인사를 나눴고 얼른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S엄마와 동생이 함께 울고 있으니 나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행히 엄마가 우는 소리를 들은 S가 나와봤고, 곧이어 S아빠도 따라 나왔다. S아빠도 얼굴에 약간의 홍조를 띠고 있는 걸 감안했을 때, 부부가 저녁을 먹으면서 술을 한 잔 기울인 것 같았다. S의 엄마, 아빠는 저녁 자리에서 우리 가족 소식을 듣고 나서 걱정했고, 아내가 입원한다고 한 뒤에 특별한 연락이 없어서 그 근심과 심려가 더욱 깊어졌던 것 같았다.
S엄마를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들여보낸 후 S아빠에게 어제오늘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해 줬고, 이제는 큰 병원을 찾아갔으니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해줬다. S엄마의 눈물에 크게 당황한 나는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고 손녀들을 봐주는 할머니들은 서로 친하게 지내고 있었고, 나이도 똑같고 하는 일도 비슷했다. 그런데 인연이 되지 않아 쉽사리 만나지 못했고, 아쉽게도 아직은 가깝게 지내지 못하고 있었다. S아빠는 나랑 특별한 친분이 없었음에도 나를 따뜻하게 안아줬다. 술기운을 빌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어색할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그런 제스처를 취해 준 것이 큰 힘이 되고 따뜻한 위로가 됐고, 우리 가족을 응원해 주는 마음이 충분히 전달됐다. 그들이 평화로운 주말에 우리를 그렇게까지 걱정해 줬다고 생각하니 더욱더 고마웠다. 나는 내일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며 S아빠까지 들여보냈다. 직접적인 교류가 많지 않았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우리를 걱정해 주고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우리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반갑기도 했지만, 그만큼 뜻밖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가족을 걱정해 주는 것은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우리에게 영향을 주거나 받는 지인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느꼈다. 감사함은 어느 나무에서 열매를 맺을지 모르는 일이니, 열매를 취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넓은 가슴을 가져야 한다. 항상 겸손해야 한다.
나는 어젯밤의 약속도 지킬 겸, 모두가 정신이 명확해진 이후에 상황 설명을 하기 위해서 오전 11시쯤 S네를 방문했다. S와 동생은 각각 텔레비전이나 책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S의 엄마, 아빠가 나랑 방해받지 않고 대화하기 위해서 조치를 한 것 같았다. S아빠는 사과를 깎고 있었고, S엄마는 식탁에 앉아 있는 내게 먼저 다가와서 나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했다. 방금 만났는데도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다. 만약에 S엄마가 울기 시작하면 내가 미안해질 것 같았고, 나도 금세 눈물을 쏟을 것 같아서 그녀의 촉촉해진 눈가를 애써 외면했다. 울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눈물만 나는 마음을 누구보다 절절하게 느끼고 있던 나였다. 그들에게 최근 3일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줬다. M병원에 가게 된 경위, G병원까지 가게 된 사투 등을 상세하게 구술했다.
그들은 끝까지 내 이야기를 성심성의껏 들어줬고, 그 후에 그들이 어젯밤에 그토록 감정적이었던 이유에 관해서 설명해 줬다. S아빠의 어머님은 오래전에 뇌출혈로 인해서 돌아가셨고, S엄마 역시 약 10년 전에 친한 친구 중 한 명을 급성 뇌출혈로 잃었다고 했다. 내가 그저께에 통화하면서 아내가 뇌신경 쪽 문제가 있었다고 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뇌혈관 질환으로 가까운 지인들이 사망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남 일 같지 않다고 여겼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한 세 명 모두 금융권에 종사하고 있었기에 각자의 일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누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고, 처음으로 이들과 오랜 시간 동안 얘기할 수 있었다. 어제 하루 종일 세상과 세상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던 내게 세상에 좋은 사람도 많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 같아 잔뜩 끼어 있던 먹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거의 며칠 만에 아내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일상적인 대화를 하니 내 마음속에 활기가 조금은 도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더 이어가고 싶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과 점심도 먹어야 하고, 엄마가 누워 있는 병원으로 데려가겠다는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S네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내가 무척 걱정됐지만, 내가 아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딸에게 집중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엄마, 아빠, 딸을 차에 태우고 G병원 앞에 있는 쇼핑몰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의 분위기는 참담하긴 했지만, 해맑게 동화를 들으며 가겠다는 딸과 이 와중에도 정치인들을 욕하는 아빠 덕분에 그나마 활기를 유지하며 갈 수 있었다. 마침 일요일 점심시간이라 붐비는 쇼핑몰 주차장에 힘겹게 주차하고 나는 딸의 손을 꼭 잡고 엄마, 아빠와 함께 식당가로 올라갔다.
아빠와 딸은 둘 다 입맛이 예민하다. 확실히 피가 물보다 진한 모양이다. 둘 다 새로운 음식에 대한 경계심과 불신이 가득해서 각자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가 매우 협소하다. 심지어 각자의 협소한 종류의 음식들이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자리 잡고 있어서, 같이 식사할 때면 메뉴를 정하기 어려워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식당은 거의 없기에, 나는 적어도 둘 중 한 명이 시원찮은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견뎌야 한다. 아빠가 먹지 못하는 다양한 음식 중에 돼지고기, 회 등이 있고, 딸은 매운 것은 당연하고, 찌개, 국 등은 거의 먹지 않는다.
딸은 회도 안 먹으면서 할아버지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거의 없는 회전 초밥집에 가자고 했다. 나는 딸에게 할아버지가 먹지 않으니 다른 데 가자고 설득했지만, 정작 아빠가 본인은 상관없다고 했다.
평소 같으면 딸을 강하게 설득해서 어른들도 같이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아봤겠지만, 나는 맞설 힘도 의지도 없었기에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다. 대기 명단에 내 이름을 써놓고 대기하던 중에 아내의 핸드폰으로 미국 텍사스에 있는 아내의 대학 동기 L에게서 보이스톡이 왔다. 나는 당연히 같은 동기인 I와 K한테 얘기를 듣고 연락했을 거라고 내 멋대로 판단하고 대뜸 아내의 상황에 대해서 주절주절 얘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은 또 기가 막히게 빗나갔다. L은 단순히 오랜만에 전화를 건 거였는데 내가 예고도 없이 L을 우리의 고통에 강제로 끌어들였다.
주말에 서로의 안녕을 묻는 근황 토크를 예상했을 L은 예상치도 못한 소식에 크게 당황했다. 며칠간 사람들에게 지겹도록 들려준 우리의 최근 며칠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 줬고, L은 말을 잇지 못했다. 준비 없이 당한 L이 물을 수 있는 것은 아내가 나을 수 있는 병에 걸린 것인지, 언제쯤 퇴원할 수 있는지 정도였다. 당연히 나는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는 질문들이었다. 이런 질문들을 받으면 자연스레 회복되지 않는 경우들이 떠올라, 되도록 미래에 대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더 우울해지기 전에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점심 먹으러 가야 한다고 하며 전화를 급히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