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에필로그

by 무색무취

우리 가족은 운이 좋았습니다. 아내가 예상보다 빠르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면서 우리 가정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뇌환우 카페에서 봤던 다른 환우들과 비교하면 훨씬 짧은 시간 안에 재활까지 마쳤기에 행운이 따랐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그런 것뿐이지, 우리 가족에게는 아내가 아팠던 시간은 영겁과 같은 세월이었습니다. 아내가 무사히 끝까지 재활을 마치고 몸이 정상적으로 회복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모든 가족원이 물리적으로 해야 할 일들과 해야 할 걱정들이 늘어나면서 몸과 마음에 가중되는 부담감, 그리고 그러한 불안감과 부담감에서 비롯되는 피로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짓눌렀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과제들을 하나씩 달성할 때마다 맞이하게 되는 청량감은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씻어낼 때마다 그 기쁨이 커졌습니다.


글을 한 번도 제대로 써본 적 없는 제가 용기를 내서 장편의 연재를 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앞서 말한 것처럼 아이를 낳으면서 살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아내가 아프고 난 이후 압축된 시간 동안 다양한 일들을 겪으면서 새로운 감정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꼭 이런 감정들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글솜씨가 뛰어나지 않지만, 서툴게라도 제가 경험한 일들과 느꼈던 감정들을 나누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용기가 될 거라 믿었습니다. 꼭 유사 질환이 아니더라도 유사한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언젠가 좋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되길 바랐습니다.

저는 뇌환우 카페의 글들을 읽으면서 환자가 위급하고 위중할 때, 환자 본인 또는 보호자들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쓴 글들을 많이 접했습니다. 하지만, 회복 후에는 글을 남기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감히 추정해 보자면 아무래도 회복 후에는 절실함이 줄어들면서 카페에 접속하는 빈도수가 감소할 것 같습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절박하게 도움을 청하고 의견을 구하는 게시판에 회복해서 상태가 좋아졌다고 말하는 것이 괜히 자랑처럼 보일까 걱정됐을 것입니다. 저 또한 아내가 회복하고 다른 사람의 댓글에 괜찮아질 거라는 말을 남겼다가 크게 후회한 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다른 사람의 글만 보고 ‘내가 그랬으니, 너도 괜찮아질 거다’라고 무책임하게 답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확률이 훨씬 높아 보였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 그 어떤 사람에게도 섣불리 아내의 회복기를 공유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장편의 글을 써서 지금 당장 고생하고 있더라도 좋아질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2. 주위 사람들에게 우리 가족에게 있었던 일들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아내가 회복하고 나서 우리에게 도움 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자리가 여럿 생겼습니다. 거기에서 우리 가족의 무용담도 나누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할 적절한 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만큼 지인들도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혼하는 사람이 청첩장 모임을 열면 그들이 으레 받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냐, 결혼 상대방은 어디가 좋아서 결혼하는 건지, 결혼식장은 어디인지,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는지, 신혼집은 어디인지 등. 일반적으로 결혼은 기쁜 일이기 때문에 묻는 사람이나 답하는 사람은 부담 없이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면서 궁금증을 해소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는 사뭇 달랐습니다. 모두가 조심스럽게 선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진정 알고 싶은 것들은 묻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느꼈습니다. 지인들에게 굳이 우리가 겪은 일들을 숨기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이 글을 통해 공유하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3. 우리 가족이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주위 사람들에 대해서 새롭게 느낀 고마움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당연하다고 느꼈던 지인들의 존재가 사뭇 다르게 느껴졌고, 평소라면 알지 못했을 그들의 관심과 온정이 따뜻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겠지만, 제게는 갚아야 할 부채가 생겼는데 이렇게 감사함을 표현하고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습니다. 제가 글을 쓰기로 마음먹으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함께 있었던 일들을 공유하겠다고 했더니 그들은 흔쾌히 써도 괜찮다며 허락해 줬습니다. 우리만의 개인적인 일들을 글감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양해해 준 많은 고마운 분들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4. 보호자들의 입장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아내가 중증 환자가 되기 전까지는 주위에서 듣고 알게 되는 환자들에 대해서만 걱정을 해봤지, 의지와 상관없이 함께 달리게 된 가족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보호자가 되어보니 환자처럼 직접 아픈 것은 아니지만,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입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환자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뿐만 아니라, 지켜야 할 것들이 현저하게 늘어나면서 급증하는 피로감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저의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아내의 상태가 호전되면서 조금씩 줄어드는 사람들의 관심과 이제는 그저 환자의 남편으로 인식하고 전락하는 지위의 가벼움이 한껏 예민해진 저에게 압박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일련의 감정들이 절대로 저만 느끼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보다도 절망스러운 상황에 놓인 환자들의 가족은 훨씬 작고 갇힌 마음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니 함께 견뎌보면 좋은 날이 올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주고 싶었습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단 한 명이라도 제 글을 읽고 잠시라도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큼 보람된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5. 앞의 이유들은 이 글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던 이유라고 한다면, 사실 글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아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아내가 의식을 되찾을 수 있게 되면 꼭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깨어날지 확신이 없을 때,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을 엑셀에 매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만약에 깨어나서 엑셀 파일을 보면, 제가 자신을 업무처럼 여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다시 글로 풀어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저 있었던 일들만 보고서처럼 나열하면 딱딱하게 느껴질 것 같아서 살을 붙이기 시작했던 것이 결국 지금과 같은 형태의 글로 굳어졌습니다. 다행히 아내는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고, 이내 건강하게 완치 판정까지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아프고 나서 세상에 유사 질환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형광펜으로 칠한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혀 몰랐던 세상에 자연스럽게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습니다. 그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운명이려니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제가 아팠던 것도 아닌데 보호자 주제에 왜 이렇게 유난스럽게 글까지 쓰나 하는 지적을 받을까 내심 걱정스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무엇이든 해보고 후회하기로 했습니다. 모두에게 응원받을 수 없겠지만, 제가 이 세상의 수많은 아픈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에 새롭게 공감하게 된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힘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부족한 글솜씨로 저의 이야기를 전해봤습니다. 앞으로도 이 병에 걸리는 사람이 없을 수 없겠지만, 비슷한 처지 사람들이 용기를 가지고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에피소드를 전하면서 제 글을 마치겠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야구광이었다.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던 나는 자연스럽게 미국 프로야구인 MLB(Major League Baseball)에 심취하고 되었다. 특히 내가 살았던 애틀랜타를 연고지로 두고 있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Atlanta Braves)의 광팬이 되었다. 1976년에 CNN, TBS, TNT 등의 미국 케이블 방송국의 창시자로 유명한 테드 터너(Ted Turner)가 브레이브스를 인수했다. 1974년부터 브레이브스의 경기를 본인의 방송사인 TBS(당시 WTBS) 미국 전역에 방송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구단 자체를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미국에 살던 1990년대에도 방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저녁 먹고 나서 TBS에서 방영해 주는 브레이브스의 경기를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심지어 90년대 초의 브레이브스는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강팀이었다. 선수단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테드 터너의 전폭적인 지지로 강력한 팀을 유지했던 브레이브스가 계속 이기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이었다. 즐거움이 계속되니 관심이 되었고 결국 나의 일부가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여건이 되는 한도 내에서 브레이브스 경기와 소식을 항상 접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인터넷이 생기기 전에는 스포츠 신문이나 스포츠 뉴스를 통해서 경기 점수라도 확인했고, NHK에서 이따금 보여주는 경기에서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어는 무시한 채, 순수하게 야구 경기만 보는 경우도 많았다. 인터넷과 휴대폰이 발달하면서 일상에서 미국의 소식을 확인하는 것이 한결 쉬워졌고, 덕분에 내 일상에 브레이브스 소식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30년 넘게 한 팀을 응원하다 보니 선수보다는 팀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다 프로 선수들이다 보니 다른 팀으로 자유 계약으로 이적하는 경우도 많았고, 팀에서 잔인하게 방출하거나 트레이드 시키는 경우도 허다해서 선수에게 애착을 갖는 것은 허무하고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자연스레 학습했다. 좋은 기억을 안겨준 선수들이 결국 떠나는 경험을 수도 없이 하다 보니 언제든지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헤어지더라도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지 않았다. 딱 한 명만 빼고.


프레디 프리먼(Freddie Freeman)은 만 17세(2007년)의 어린 나이에 브레이브스에 드래프트 되었다. 정교한 타격을 바탕으로 마이너리그를 씹어먹은 그는 만 20세의 나이(2010년)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했고, 2021년까지 팀의 주축 선수로 맹활약했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팀의 주장 역할을 자청하며 언론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항상 고마웠다. 유머러스한 인터뷰들은 팬으로서 뿌듯해지는 광경이었다. 그가 브레이브스에서 뛴 마지막 해인 2021년에 팀을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우승한 이후의 오프시즌에 자유계약 선수의 신분이 된 프리먼이 당연히 브레이브스와 재계약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2021년 시즌 이후에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선수 노조 간의 노사 협정(CBA, Collective Bargaining Agreement)이 만료되면서 극단적인 직장폐쇄에 이르렀고, 중간에 에이전트의 장난질까지 더해져 프리먼은 결국 브레이브스를 떠나게 되었다.

freddie freeman_braves.jpg 월드시리즈 진출 확정 후 포효하는 프리먼(2021)

나보다 어린 친구(1989년생)에게 이렇게까지 깊은 애착을 가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당연히 발표될 거라 여긴 프리먼의 재계약 소식만 오매불망 기다렸다. 잠에서 깨면 자는 사이에 바다 건너에서 재계약 소식이 들려왔을까 하고 항상 휴대폰을 확인했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프리먼과 재계약할 수 없을 거라 판단한 브레이브스의 단장은 다른 팀에서 프리먼의 대체자를 과감하게 영입했다. 프리먼과의 계약 불가 발표를 한 적은 없지만, 사실상 이별을 공인한 셈이다. 내가 아꼈던 수많은 선수가 팀을 떠날 때도 충격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프리먼이 떠난 후로는 며칠간 헛헛한 마음을 잠재울 수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우울해지고 프리먼이 팀을 떠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프레디 프리먼은 2022년 시즌부터 LA 다저스로 이적해서 뛰고 있다. 브레이브스를 떠난 다른 선수들과는 다르게 항상 프리먼의 경기 성적을 확인하면서 먼발치에서 응원했다. 브레이브스가 우승을 못 한다면 다저스가 우승해서 프리먼이 명예의 전당 선수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원하기도 했다. 그런 프리먼이 올여름에 갑작스레 결장하기 시작했는데 어디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이유 모를 결장이 길어졌는데, 그 기간이 거의 열흘이 되었다. 웬만큼 아프지 않고서야 경기에서 빠지는 걸 극도로 꺼리는 선수가 출전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가족 일이 아니고서야 오랜 기간 동안 결장하는 게 설명되지 않았다. 그리고 슬프게도 내 예상이 맞았다.


프리먼의 네 살배기 아들이 거의 2주 정도 아파서 고생했다고 했는데, 간담이 서늘했다. 프리먼의 아들도 길랭바레증후군에 걸렸던 것이다. 아내가 고생했던 병의 이름이 자가면역뇌염으로 알고 있긴 하지만, 길랭바레증후군과 자가면역뇌염 간에 정확하게 하나의 병만 콕 집어서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프리먼이 복귀 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아들의 증상을 설명하는데, 아내와 증상이 정도의 차이가 있었겠지만, 병의 진행 과정은 거의 동일했다. 이토록 애착을 가지는 선수가 나와 똑같은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니 묘한 동질감이 생겼다. 자기 아들에게 있었던 일을 묘사하면서 결국 참지 못하고 언론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데, 그 감정이 화면 너머로 여실히 전달되고 너무도 깊게 공감돼서 나도 괜히 울컥했다. 프리먼은 눈물의 복귀전을 가졌고, 시즌 막판에는 발목을 다치면서 플레이오프 출전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와 2라운드는 간간이 뛰었고, 월드시리즈에서의 활약도 예상하기 힘든 지경이었다.


앞선 라운드에서 팀에 기여하지 못해 마음이 불편했을 프리먼은 심기일전했고, 월드시리즈에서 홈런을 쳐내기에 바빴다. 심지어, 2021년 월드시리즈에서 시작된 연속 경기 홈런 기록을 이어 나가면서 월드시리즈에서 5경기 연속 홈런을 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아들의 기운까지 담아서 병마를 타파하듯 연신 관중석으로 야구공을 날려 보내기에 바빴다. 여세를 몰아서 기어코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까지 했다. 그리고 당연히 월드시리즈 최우수선수(MVP)에 등극했다. 그는 보기 좋게 앞에 놓인 위기를 멋들어지게 이겨내고 극복했다.

항상 언론 친화적이었던 프리먼이 시즌 중에 아들에게 있었던 일과 관련하여 개최한 기자회견을 보는데 어쩜 이렇게 똑같은 마음일까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발언을 했다.


“I know Dodger fans don't like this, but I would gladly strike out with the bases loaded in the bottom of the ninth inning in Game 7 of the World Series 300 million times in a row than see that again.”

(다저스 팬들이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아들이 그 지경이 되는 걸 다시 보느니 월드시리즈 7차전 9회 말 만루 찬스에서 3억 번이라도 삼진 당하는 쪽이 훨씬 낫습니다.)


그랬던 그는 거짓말처럼 월드시리즈 1차전 10회 말 2아웃에 팀이 한 점 뒤지고 있는 상황에 타석에 들어섰다. 본인이 얘기했던 것처럼 삼진을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병마를 훌륭하게 이겨낸 아들에게 보란 듯이 멋지게 초구에 만루홈런을 쳐냈다. 본인의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내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freddie freeman_dodgers.jpg 월드시리즈 1차전, 끝내기 만루홈런을 친 프레디 프리먼(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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