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복귀(完)

by 무색무취

온 가족이 함께한 체육대회가 열린 이후에 딸과 둘이 이태원을 간 적이 있다. 딸과 얘기하다가 아내가 일요일 아침에 한 번씩 요리해 주던 팬케이크가 떠올랐다. 어디선가 본 이태원의 팬케이크 가게에 나중에 아침으로 팬케이크를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더니 딸은 흔쾌히 응했다. 그리고, 아내가 퇴원하기로 되어 있던 며칠 전, 딸과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택시를 타고 이태원으로 향했다. 9시 전에 도착했는데도 미국식 다이너 콘셉트의 식당에는 예상보다 많은 손님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펼쳤다. 다양한 메뉴가 있었지만, 어차피 입 짧은 딸은 많이 먹지 않을 거라는 것을 예상했기에, 큰 오믈렛과 사이드로 작은 팬케이크 세 장과 해시 브라운을 주문해서 나눠 먹기로 했다. 새로운 식당에 가기 전에 항상 인터넷을 통해서 검색하는 나는 이미 오믈렛의 크기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고 갔다. 하지만, 내 앞에 놓인 음식의 양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조그마한 럭비공 크기의 달걀 요리는 속까지 익었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두툼했지만, 겉은 메마르지 않고 속은 촉촉하게 익어 있어 아침으로 먹기에 적절한 익힘이었다. 딸은 사이드라고 하기에는 충분히 큰 팬케이크를 1개 반 정도 겨우 먹었고, 오히려 곁들여 주문한 해시 브라운을 더 맛있게 먹었다.


기나긴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 부녀는 근처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들렀다. 밖에 있는 탱크, 비행기 전시들만 봐도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흥미롭게 구경했는데, 심지어 기념관 한쪽에 있는 어린이박물관에서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전쟁에 대한 각종 전시, 그림 그리기 등의 다양한 체험을 한 우리는 금세 배가 고파졌기에 점심을 먹으러 다시 이태원으로 향했다. 이태원의 명물인 조각 피자를 함께 먹고 다시 후식을 먹기 위해 또 부지런히 이동했다.


이태원에는 팬케이크를 먹으러 간 것도 있었지만, 굳이 먼 거리를 이동해서 그곳까지 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딸이 예전부터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레몬 셔벗을 먹기 위해서였다. 일전에 우리 가족이 베트남 냐짱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딸은 그 리조트에서 먹었던 레몬 셔벗의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다시 먹고 싶다고 연신 얘기했다. 팬케이크, 전쟁기념관, 피자는 모두 딸의 레몬 셔벗을 위한 빌드업이었던 셈이다. 주말이었지만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한 이태원의 오후는 꽤 한산했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향해 가는 길은 인파가 많지 않아 나지막이 걸어가면서 주위 풍경을 살필 수 있었다. 신기한 물고기 모양의 장식이나 조그마한 횟집 앞에 때가 잔뜩 낀 수조를 감상하면서 걷던 우리 앞에 아기자기한 케이크 가게가 나타났다.


나는 케이크 가게를 보자마자 멈춰 섰고,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딸의 손을 이끌고 케이크 가게로 들어갔다. 기념일에 케이크를 사도 우리 가족원 중에 열심히 먹는 사람은 없다. 딸은 크림 느낌이 거북하다고 했고, 아내나 나는 케이크를 먹으면 살이 찔 것 같은 두려움에 목구멍으로 편하게 넘기는 일이 없었다. 그저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분을 내기 위해서 준비할 뿐, 중요한 날이 지나가고 나면 버리기 아까워서 꾸역꾸역 먹는 게 케이크를 소비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원들의 생일일 때는 되도록 작은 케이크를 사려고 노력했다. 진열장의 케이크들도 우리 가족이 먹기에 제법 큰 것 같아서 가게 주인에게 혹시 작은 케이크를 주문할 수 있냐고 물어봤고, 주문 제작해서 받으려면 언제까지 주문하면 되냐고 물어봤다. 결론적으로 이 가게에서는 내가 원하는 케이크를 사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판단에 도달했지만, 이 짧은 방문은 내게 큰 영감을 줬다.


가게에서 나오면서 나는 딸에게 작은 제안을 하나 했고, 딸은 한껏 신난 목소리로 나의 제안에 힘차게 응답해 줬다.


“엄마가 병원에 나올 때 기념 케이크를 하나 사줄까?”

“응! 좋아!”


나는 평소에 호들갑 떠는 것을 극도로 조심하며 기념일을 부산스레 챙기는 것을 남사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퇴원일만큼은 유난스럽게 티 내고 싶었다. 아내의 퇴원을 축하하는 마음도 크지만, 우리 가족이 다시금 하나가 되고 나도 드디어 긴장을 풀어도 되는 순간을 마음껏 축하하고 싶었다. 거의 처음으로 나를 위해서도 케이크를 산 순간이 아닐까. 케이크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은 우리는 인터넷으로 주문이 가능한 제과점들을 찾기 시작했다. 장모님도 함께 합세하여 셋이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조그마한 초콜릿케이크에 분홍색 딸기 맛 크림을 올려서 아내의 모습과 똑 닮은 캐릭터까지 감초처럼 가운데 새기기까지 했다. 아내의 퇴원 전날에 배송이 오게끔 주문하고 냉장고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 우리 셋은 모두 한 패가 되었다. 아내가 냉장고 문을 열더라도 티가 나지 않도록 맨 아래 칸의 가장 안쪽 구석에 케이크를 숨겨놓고 아내의 퇴원일이 되기만 기다렸다.


드디어 아내가 퇴원하는 날. 아내가 우리와 약속했던 것처럼 딸과 나의 생일이 있는 6월이 되기 딱 하루 전, M재활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지만, 엄격한 면회 정책 때문에 마음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주말 외출을 끝내고 병원으로 향하는 길이 시작하자마자 끝나서 우리 모두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체감할 때나 집과 병원이 가깝다는 자각을 겨우 했다.


오전에 퇴원하기로 한 아내를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데리러 가기로 했고, 나는 언제나 그렇듯 출근했다가 오늘만 특별히 조금 일찍 퇴근해서 아내가 돌아와 있는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날따라 출근길이 특별하게 느껴지거나 하늘이 유난히도 따스해 보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똑같이 회사에 나가서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저 조금 일찍 퇴근하는 날처럼 느껴졌다. 애타게 기다리던 발표가 아무리 새로고침을 수백 번 눌러도 뜨지 않고 결국 지쳐서 뒤늦게 결과를 마주할 때는 큰 감흥이 없는 것처럼 여러모로 지쳐버린 나는 올 것이 왔구나 싶은 정도의 마음만 들 뿐이었다.


대표님과 J형에게 아내를 맞이하러 간다는 신고를 하고 회사를 나섰다. 나와 매일을 함께 한 J형은 심지어 오늘인지 다음 주인지 지난주였는지 헷갈릴 정도로 아내의 퇴원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워낙 남들 일에 관심이 없는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아내가 입원해 있는 것이 당연해질 만큼 시간이 오래 지났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에게 나는 그저 아내가 병원에 있는 사람일 뿐이고, 나에게나 특별한 일이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나 걱정되고 놀라고 그 이후에는 점점 무뎌지는 게 당연한 처사다.


드디어 아내에게 이제 집으로 갈 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아내가 나를 집에서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이 얼마나 기다렸던 일인가. 부리나케 집에 달려가니 아내는 언제 아팠냐는 듯이 소파에 두 다리를 뻗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딸은 아내에게 오늘만큼은 꼭 유치원 하원 길에 와 달라고 했었고, 아내는 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퇴원하고 바로 유치원으로 달려갔다고 했다. 딸은 거의 석 달 만에 두 팔 벌려 기다리고 있는 아내를 집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딸이 엄청나게 기뻐할 줄 알았는데, 또 그렇지도 않았다. 감정 표현을 쑥스러워하고 서툰 딸은 속으로는 기쁘더라도 겉으로는 크게 표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런 성격 덕분에 딸이 아내와의 이별을 견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내의 퇴원을 축하하는 의미로 장인어른과 장모님까지 해서 외식을 했다. 딸이 좋아하는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에 가서 그간의 회포를 풀기로 했는데, 막상 식당에 앉으니 언제 그 많은 일들을 겪었냐는 듯 자연스러운 가족 식사의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굳이 석 달 간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내가 병원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집중할 뿐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유니클로에서 대대적인 세일을 하길래 바지 쇼핑까지 하고 헤어졌다. 드디어 일상으로 돌아왔다.


너무 늦지 않게 집에 돌아온 우리는 자연스럽게 짐을 풀었고, 아직 짐 정리가 완전하게 끝나지 않은 아내는 사부작사부작 집을 누비며 다니고 있었다. 아내가 한눈팔고 있는 틈을 타서 딸과 나는 아내 모르게 딸의 방에서 긴밀하게 비밀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문을 닫고 속닥속닥하는 모습은 꼭 일본 순사들을 피해서 비밀 회동을 하는 독립군 같았다. 이미 냉장고 깊은 곳에 있던 케이크를 몰래 숨겨서 딸의 방으로 가져갔던 나는 이제 딸을 방패 삼아 케이크에 촛불을 꽂고 그 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사이에 딸은 나가서 아내를 방으로 데리고 왔다.


아내는 나와 성격이 무척 다르다. 나보다 감정의 진동 고저가 훨씬 짧아서 나를 진정시켜 주는 경우가 많고, 내가 괜히 혼자서 열 내고 있으면 눈빛으로 별일이 아니라는 눈치를 주면서 괜히 내가 머쓱해지게끔 하는 힘이 있다. 나머지 한 짝의 젓가락처럼 보완재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다. 머리 위에 물음표가 뜨면 떴지, 흥분하면서 감정의 동요가 이는 경우는 거의 없는 사람이 바로 아내였다.


그런 아내도 촛불이 꽂힌 케이크를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입을 틀어막았다. 작전이 성공해서 히죽히죽 웃고 있는 우리에게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촛불을 힘차게 불어서 끄면서 우리 가족의 재회를 기념했다. 아내는 순식간에 감정을 추스르고 우리에게 언제 이런 걸 준비했냐며 신기해했고, 딸과 나는 기뻐하는 아내를 보며 인터넷을 주문해서 별로 힘든 게 없었다고 너스레를 떨 뿐이었다. 그 와중에 딸은 본인이 아내와 똑 닮은 얼굴 모양을 골랐다며 자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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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집으로 돌아왔지만, 혼자서만 온 것이 아니라 아내의 병력도 함께 데려왔다. 아내의 병이 거의 완치되었다고 하지만, 아내가 아팠던 기억은 사라지지 않은 채 그림자처럼 언제나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증상이 도졌을 때의 거친 숨소리만 들어도 입원하던 날의 악몽이 다시 떠오를 것이고, 손발이 조금만 아프다고 해도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 보고 놀라듯 소스라칠 것이 분명하다. 깨진 거울로 얼굴은 비춰서 볼 수 있지만, 금은 사라지지 않듯이 우리네 가족에게 흉터가 생겼다. 하지만, 이를 거부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잘 다스리면서 사는 수밖에. 모두 각자의 흉터를 어루만지며 살고 있고, 우리라고 특별한 것도 아니다.


딸이 잠들고 아내의 짐 정리를 함께 도와주면서 G병원에서 퇴원할 때 전달받아 놓고 꼴 보기 싫어서 베란다 한구석에 처박아놨던 결박끈을 발견했다. 아내가 유동식으로 식사를 대신할 때,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콧줄을 계속 잡아당겨서 어쩔 수 없이 두 손목을 침상에 묶어두었던 바로 그 끈. 우리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는 보지 말자는 강력한 결별 인사와 함께 아내를 그토록 괴롭혔던 끈을 쓰레기통에 집어넣고는 뚜껑을 닫아버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우리 주위의 그 누구도 이런 아픔은 만나는 일이 없기를. 아내도, 딸도, 나도 아픈 기억은 서서히 희미해질 수 있길. 우리가 같이 극복해 나간 이 시간이 우리 가족을 더욱 끈끈하게 연결해 주기를. 아내의 복귀가 다시 가족의 희망이 되어 주기를.




지금까지 관심 깊게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에 에필로그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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