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의지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면, 극도의 불안과 고통 속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신체가 건강해도 점차 모든 감각과 이해의 범위가 축소해 자기 존재가 희미해지면, 존재론적 죽음의 문턱을 넘은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정신이 건강해도 자기 한 몸을 추스르기 어렵다면, 자신의 무너지는 삶을 선명하게 느끼며 절대적인 심적 고통 속에서 급속히 쇠약해질 수도 있다. 재산이 많아 회복에만 집중한다고 해도 그 개인이 느끼는 절망감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데,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기 힘든 대부분의 사람이 느끼는 절망감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서서히, 덜 고통스러운 노환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축복이겠지만, 이러한 삶을 위해 인생 전반에 걸쳐 정제된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타고난 기질과 꾸준한 노력이 함께하지 않는 한 매우 어려울 수 있다. 또한 인생 최후반부만을 위해 모든 여력을 집중하는 삶은 오히려 인생 전반의 만족도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의 기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 것이고, 각자의 처지에 맞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에 완전히 몰입하여, 그 고통을 가장 큰 절망으로 느낄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그 고단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속도와 깊이가 다르기에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두려운 죽음을 향한 숙명은 피할 수 없다. 나는 매일 정서적 안정 속에서 고요한 행복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죽음의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 죽음이 언제 다가올지 모르기에 하루하루를 평범하게 만족할 수 있는 주체적이고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아주 조금씩 수용하고 있다. 아마도 평범한 노환에 다가갈 수 있다면, 늙고 병든 나는 혼자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이 차가 많기에 순리에 따른 순서를 살필 수 있으니, 내심 혼자가 되는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예상이 어렵더라도, 누구나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은 고독할 것이다.
그 정지한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바랄까. 지금의 나는 알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나는 현재의 내가 그나마 올바르다고 여기겠지만, 훗날 노환으로 판단이 흐려진 나도 역시 자신이 올바르다고 여길 것이다. 지금은 솔직히 존엄한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 연명 치료는 받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시기의 내겐 아무도 없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는 내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혼자 사라지고 싶다. 나는 이 의사가 존중받길 원한다. 그렇기에 훗날의 나 역시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지금은 여러모로 마음의 준비는 하되, 미리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고통을 겪을 시간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 시간 속에서 다짐하면 된다. 마지막 순간의 내가 내린 판단이, 마지막의 내가 바란 판단일 것이니, 나는 그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나는 완전한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끝이 나면, 그냥 끝이 난 것이다.
2024년 5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