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황무지를 걷는다

by 응시하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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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오른손으로 밧줄을 단단히 움켜잡고 천천히 걷고 있다.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의 끝은 멀찍이 떨어진 원통형 쇠기둥에 한 바퀴 감긴 채 단단히 매듭지어져 있다. 그 사람은 밧줄을 바짝 당긴 채 정면을 바라보며 걷지만, 결국 쇠기둥을 중심으로 원을 그릴 뿐이다. 쇠기둥은 오랜 시간 밧줄에 쓸려 변색되었지만, 밧줄은 여전히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 사람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머리 위 구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셀 수 없이 많은 구름의 그림자가 광활한 지면을 스치듯 지나가고, 거대한 태양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내내 땅 위의 모든 그림자가 춤을 춘다. 그렇게 그 사람이 한 바퀴를 걷는 동안 낮과 밤이 한 번씩 바뀐다.


그 사람은 먼 곳을 바라보며 걷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얼 발견한 건지 밧줄을 단단히 잡은 채, 재빠르게 양손을 번갈아서 밧줄의 안쪽을 잡아가며 길이를 줄인다. 그러나 쇠기둥을 중심으로 걷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는 듯, 보려던 것을 끝내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그리고는 아쉬운 기색을 띠며 다시 밧줄을 풀어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한 바퀴를 돌고, 다음 바퀴에 그 사람은 더 이른 시기에 밧줄의 길이를 조절한다. 그리고 지평선 끝의 아지랑이 너머에 있는 판잣집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판잣집이 보이는 지점을 금세 지나치지만, 그래도 흡족한 듯 잠시 연한 미소를 짓는다. 그 사람은 원을 그리며 걷는 내내 조금 전 판잣집뿐만 아니라 지평선 곳곳을 꼼꼼히 살핀다. 쇠기둥을 중심으로 밧줄이 허용하는 최대 거리 내에서, 지평선의 모든 것을 눈에 담으려 한다.


그 사람은 계속 걷고 있다. 어느새 얼굴의 주름이 늘었지만, 여전히 지쳐 보이지는 않는다. 이미 대부분 풍경을 눈에 담았는지, 정면만 바라보며 걸을 뿐이다. 이제는 채 한 바퀴를 걷기도 전에 하루가 바뀐다. 그 사람이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뒤로 펼쳐진 세계는 점점 더 가속하고,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빠르게 변한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이미 익숙한 듯 걸음을 멈추지도, 밧줄을 놓지도 않는다. 어느새 그 사람은 주름이 더 늘었고, 몸도 야위었다. 이제는 멈출 수 있을 것 같지만, 끝내 발을 내디딘다. 밧줄도 놓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럴수록 밧줄을 더 세게 움켜쥔다. 그렇게 걸으면서 자신이 변했다고 믿다가도, 결국 변한 것은 없다고 깨닫는다.


이제 그 사람에게는 정면을 보고 걸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도 지친 듯 단지 걸으면서 밧줄을 붙잡으려 애쓰고 있다. 그 순간, 그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밧줄을 놓는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가만히 서서 한 바퀴를 돌며 주위를 천천히 둘러본다. 이 낯선 감각 속에서 그 사람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한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밧줄을 잡고, 늘 걷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밧줄을 잡은 채 보고 싶은 것을 보면서 걷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황량한 대지에 홀로 떨어진 사람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잡고, 걷는 것뿐이다.


한참 시간이 지났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걷고 있다. 백발이 된 채 느릿느릿 발길을 옮긴다. 하지만 밧줄만큼은 놓지 않고 정면을 보면서 걷고 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 사람이 사라지고 없다. 그 사람이 사라지자, 밧줄도, 쇠기둥도 함께 자취를 감춘다. 하늘을 뒤덮은 구름도 멈추고, 태양도 더 움직이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지난, 광활한 황무지는 처음과 같은 모습이다. 달라진 것은 한 존재가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뿐이다.


2024년 0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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