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채색 거리를 걷는다

by 응시하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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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척에 보이는 길이 어디로 연결되었는지는 몰랐지만,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 길을 걷는 내내 빼곡한 군중이 내 곁을 스쳐 갔다. 그러나 모두가 제 갈 길을 갈 뿐, 그 누구도 나와 같은 길을 걷지는 않았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모든 감각이 무뎌져만 갔다. 정신을 차리고자 주위를 살폈지만, 발을 내디딜 때마다 이어지는 새로운 길만 선명하게 보일 뿐이었다. 나는 알 수 없는 무력감 속에서 커지는 불안을 달래고 싶었다. 그러나 한순간의 안정을 바라는 본능조차도 스친 군중 틈으로 사라졌다. 공허한 길을 걷는 내게 남은 건, 인간으로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최소한의 매력뿐이었다. 간혹 이 흔적에 이끌려 분리된 감각조차 넘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아닌, 이 절연함에 잠겨 있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일시적 관심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자신을 잘 안다고 여겼다.


그러나 나를 인지하며 고개를 숙인 순간, 조금 전 생각이 무색하게 검게 그을린 몸이 보였다. 나라고 여긴 몸에는 불안과 자기혐오로 소용돌이치는 감각만이 남아, 몸과 의식을 오가며 나라는 형태를 간신히 유지할 뿐이었다. 그간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은, 무너지는 내 본질이 믿고자 했던, 내게 남은 희망의 끝자락 풍경이었다. 눈앞의 선명한 길도 정서적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욕구의 궁극적인 형태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충족되는 것이 없으니, 끝없는 욕구만이 샘솟아 나를 인도한 것이었다. 나는 그저 검은 몸으로, 검은 풍경 속의, 검은 길을 따라 걸었을 뿐이었다.


"이제 종착지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한다. 이 꺼져가는 욕망의 발산으로부터, 욕망을 충족하는 듯한 도취감을 느꼈다는 사실에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여전히 눈앞의 길을 걷고 있다. 사실 나의 길은 이미 끝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소멸했고, 남은 욕망만이 그저 제 길을 걷는 것일지도 모른다."


2024년 0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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