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감상'을 찾아서
한창 싸이월드가 풍미하던 시절, 웬만한 사람들만큼 도토리에 탕진하고 다이어리에는 소소한 깨달음을 기록하고 누군가 봐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슬며시 속내를 비추기도 했다. 사진첩에는 감성적인 사진들과 나만의 감상적인 글귀들로만 채운 폴더가 있었다. 지금 누군가 열어본다고 상상해보면.. 으아 폴더명조차 부끄럽다. 상상하고 싶지 않다 온 몸을 내던져 막으리라.
지금 나는 ‘무쓸모’로서의 존재, 휴지기를 맞이하였다. 쉬는 모든 존재가 쓸데없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내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의무의 노예로(만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지내온 내게는 어쩌면 당연한 자아인식일지도 모르겠다. 사무실 내 자리 내 책상(사실은 내 것이 아닌)에서 전화를 받고, 문서작업을 하고, 회의를 하고, 출장을 가는 사회인으로서의 활동과 이를 통해 밥벌이하며 그나마 나잇값(이라는 게 있다면) 할 수 있는 공간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존재.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오다 어딘가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됐다. “나는 쓸모 있는 존재로 살아야만 하나, 무엇을 위한 쓸모인가"
휴지기와 함께 찾아온 서른일곱이라는 숫자가 무척 낯설다. 새해 헬스장에 등록하면서 적은 서른일곱이라는 숫자는 새삼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어른’의 나이이다. 늘 내 나이를 의식하며 사는 것은 아니지만, ‘일곱’이라는 숫자를 달 때, 새로운 세대로 넘어가기 삼 년을 앞둔 시점의 새해에는 꼭 제 나이를 곱씹어 봤던 것 같다. 열일곱 살 때 17이라는 숫자는 아주 딱 완벽해 보여 더 나이 들고 싶지 않았다, 18도, 19도 어쩐지 ‘쌔끈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스물’은 영영 올 것 같지 않은 실감 나지 않는 미래였다.
스물일곱 살 때, 27이라는 숫자는 마지노선 같았다. 현재 직장인이든 학생이든 상관없이, 뭔가 ‘젊음’의 마지노선 같은 숫자로 느껴졌다. 28이나 29는 이미 가득 찬 느낌이고.. 서른으로 수렴해가는 그런 나이라고. 하물며 37이야..
이제 곧 마흔으로 수렴해 갈 텐데, 사실 나는 지금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생각할 시간이 없을 때는 하루하루를 버티기도 하고 누리기도 하며 어떻게든 살아냈던 것 같은데, 막상 생각할 시간이 주어져 내가 누구인지 생각하다 보니 정말이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고, 그런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쉽지가 않다. 수시로 찾아오는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 어떤 선택이 ‘나다운’ 것인지, 사실 난 잘 모르겠다. 매번 선택이 어렵다.
학창 시절, 나는 감상적(感傷的)이었다.
‘감상적’이란 건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지나치게 슬퍼하거나 쉽게 기뻐하는. 또는 그런 것’으로, 유의어에는 ‘낭만적’, ‘시적’이 있고, 반의어에는 ‘이성적, ‘논리적’이 있다. 지금 돌아보니 그렇다. 당시 나는 나름 시니컬(돌아보면 유치한)하고 이성적인 타입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시절 썼던 글들을 보니 오그라들정도로 감상적이었던 것이다. 나는 영화, 공연을 보거나 책을 읽고 지나치게 슬퍼하기도 했고, 하늘과 구름과 햇살을 보며 쉽게 기뻐했으며, 그것을 기록했다.
그 기록물이란 것은 딱히 ‘쓸모’가 있지 않았음에도, 곧 실용적이지 않았음에도, 나름 상당한 시간과 수고를 들여 작성했었다. 심지어 엄청난 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지도 않는 글에(일촌공개였는데, 50명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상당한 시간을 들여 ‘게시하기’까지 꽤나 수정 및 보완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시간’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음악 감상에 젖어들며 감성을 재생산하며 빠져드는 시간, 그 영화를 곱씹을 시간, 그 생각을 정리해 볼 시간, 일종의 ‘쓸모없는 놀이 같은’ 그렇지만 나 자신의 감상에 오롯이 집중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나의 ‘생각’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고, 그것을 정리해 나가며 스스로를 체득해 나갔다.
직장 생활, 나는 현실적이 되었다.
‘현실적’이란 것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실제로 얻을 수 있는 이익 따위를 우선시하는. 또는 그런 태도”를 일컫는다. 나는 어느새 ‘이익’을 우선시하게 되었으며, 이익을 볼 수 없는 무익한 것은 후순위로 밀려나게 되었다. 감상적일 틈이 없기도 했지만, 그럴 틈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지 않기도 했다. 오늘 하루 해야 할 일들을 리스트업 하고, 한 번에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처리하고, 그 사이사이 칼날처럼 치고 들어오는 내일도 남의 일도 아니지만 어쨌든 해야 되는 일들 속에, ‘진짜’ 생각할 틈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잃는다.
업무 처리 과정에는 ‘논리’와 ‘명분’이 있어야 하고, 나는 끊임없이 계산하고, 따져보고, 그럴싸한 논리를 만들어 내는 생각을 한다. 명분싸움에서 승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혈투에 수시로 내몰린다. 그래야 나를 지킬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애초에 그런 뇌구조나 DNA가 발달된 타입은 못 돼서, 그 과정 자체가 매번 힘겹고, 그만큼 스트레스는 쌓여간다. 실패도 성공도 쌓여간다.
그런 시간들이 지속되자, 몸과 영혼은 탈탈 털려가게 되고, 실용적인 것, 꼭 필요한 것 외에는 그 어느 것도 할 여력이 없다. 물론 나도 살아야 되니까, 종종 영화도 보고, 공연도 관람하고, 전시회에도 가지만 그것에 오롯이 젖어드는 일은 없다. 감정과 감동은 금세 휘발되어 버리고, 주어진 현실과 사무실에 빨리 몰입할 수 있는 몸과 마음으로 스스로를 세팅한다. 물론 모든 직장인이 그렇지 않다는 건 안다. 이것은 나의 한계다.
돌아보니 나라는 사람에게 두 가지 모두를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도를 아예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이미 과부하가 걸려 버린 머리와 마음에 다른 것을 채울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맞겠다. 그러다 어쩌다 얻게 된 ‘멈춤’의 시간. 나는 쓸모 있는 인간에서, 당장에 쓸모 있지는 않은 존재가 되었고, 나의 시간은 기존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간다. 그 안에서 나는 실용성을 뒤로한 채, 사치스러운 생각들을 다시 피어오르게 놔두어 본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끄적여 보기로 새해 결심을 한다.
진짜 쓸모란 무엇일까.
감성이 메말라 가면서 제대로 슬퍼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못하고, 나 자신의 생각이라는 것은 옅어져 가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잘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상태에서, 지금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건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 아닐까?
직장 생활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잘라내 버린 것들을 다시 자라나게 둬보려고 한다. 무용한 존재가 되어 버린 이 시점(누구도 내게 그렇게 말하진 않지만)에, 무용한 것이 되어버린 것들로부터 나 자신을 조금씩 되찾아 가는 여정을 시작해 보기로 한다. 어쩌면 너무 오래, 멀리 와버린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글쓰기라 부르기도 뭣한 작은 끄적거림이 나 자신을 회복시켜주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것이라는 무척 낭만적인 기대와 함께 :)
(2019년 1월 21일 작성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