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인생의 대혼란기
드라마 봄밤(MBC/2019년)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생각을 정리해 두고 싶다. ‘봄밤’이라는 ‘봄의 밤’ 그 자체와 ‘사랑에 빠진다’는 추락, 그리고 기적에 관하여.
정해인도, 한지민도, 안판석도,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도 아니었다. 내가 이 드라마를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오로지 ‘봄밤’이라는 제목과 '봄밤은 알고 있다. 당신이 사랑에 빠지리라는 것을’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슈가볼의 ‘여름밤 탓’이라는 노래를 좋아하는데, '여름밤 탓’이 여름이라는 계절만큼이나 뜨겁고 싱그러운 이십 대의 순수함을 포착했다면, ‘봄밤’은 인생의 환절기, 과도기를 맞은 삼십 대 중반 이후의 혼란을 포착한다.
이정인과 유지호는 모두 35세 정도의 인물로 나오는 데, 이 연령대로 설정한 건 상당히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정인의 경우 전 남자 친구를 4년 정도 만난 것으로 나오니, 30대 초반을 현재 남자 친구와 관계 속에 보낸 것이고, 30대 중반 이후로 넘어가는 35세의 봄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나의 35세는 돌이켜 보면 극한의 혼란기였다. 이제 40을 향하여 가는 나이가 된 것 같고, 아직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결혼이나 사랑의 로망을 말하기에는 나잇값을 하지 못하는 것 같고, 그렇지만 내가 생각했던 결혼이나 사랑은 이런 게 아니라는 생각. 결혼을 어떤 사람과 하느냐는 그 사람이 실제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지, 아니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아주 혼란스러웠던 시기이다. 어른의 나이였지만, 어른은 아닌 그런 상태랄까.
어쨌든 나로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 인생의 환절기에 놓인 주인공들은 마침 나타난 ‘뜻밖의 그대’로 인해, ‘뜻밖의 혼란’을 맞이하게 된다. 급작스럽게 휘몰아치는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 내 탓도 네 탓도 아닌 ‘봄밤 탓’을 해볼 수 있도록, 이 드라마는 봄밤의 분위기 그 자체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적어도 내가 느끼고 기억하는 봄밤은 그렇다.
차갑고 어두운 겨울을 지나 벚꽃이 흩날리고, 마음을 간지럽히는 바람이 불고, 어깨에 잔뜩 쌓아둔 긴장을 풀어주는 달큰한 공기가 온몸을 부드럽게 휘감는 ‘그’ 봄밤. 그 조용한 봄밤은 하나의 마법처럼 두 주인공의 배경이 되어준다.
드라마 봄밤의 한 톤 혹은 두 톤 이상 어두운 영상과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한 정적인 화면은 봄밤이 얼마나 이들을 조용하게 지켜보는지, 응원하는지 보여준다. 현실의 지원군은 소수이지만 아주 큰 틀에서는, 어쩌면 온 우주가 사랑하라고 부추기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사랑에 빠진 당사자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것이고, 그러한 생각이 드라마의 내용뿐만 아니라 스타일을 통해서도 충분히 전달된다.
이정인은 4년 정도 만난 남자 친구와 이미 상당한 시간 전에 균열을 직감했지만, 이를 방치하고 일상을 살아간다. 일상은 충분히 힘들고 정신없으며, 그 와중에 익숙한 상황을 깨뜨린다는 것은 어떤 결정적 계기 없이는 좀처럼 쉽게 벌어지지 않는 일이다. 그러다 유지호라는 새로운 존재가 계기가 되면서 그 문제는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극 중 이정인의 대사에 나온 것처럼(그대로는 아니지만 맥락을 정리하면), 새로운 남자의 등장 “때문에” 헤어지게 된 것은 아니다. 지연되고 유보된 상태였던 이별이, 어떤 계기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렇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그 남자의 등장 “때문에만” 헤어지게 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게 맞겠다. 그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 어느 봄밤이 아니었더라면, 지연된 이별은 어쩌면 몇십 년은 더 지연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진다는 기적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것을 잡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정인은 고민한다. 결혼은 다 이런 건지, 모두 이런 상태에서 결혼하는 것인지, 결혼이라는 건 무엇인지. 꽤 오랜 기간 만나서 편안하기도 하고 분명 처음에 어딘가 좋아서 만났을 것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한다는 느낌은 분명히 아닌데 이게 맞는 것인지. 새로운 사람의 등장에 설렌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게 정말 운명 혹은 진짜 사랑이어서인지, 아니면 이 조차도 지금의 관계처럼 결국 나중에는 변해 버릴 그런 순간의 감정일 뿐인지.
이런 고민들과 사랑에 빠져버리는 전개는 거의 동시에 흘러간다. 새로운 사랑을 부정하고 선을 그으려고 애를 쓰는 순간과 이를 뒤집는 순간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될 만큼 거의 동시에 전개된다. 여주인공을 욕먹게 하는 동시에, 이 드라마의 현실성을 담보하는 지점은 이런 장면들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급속도로 빠져버린 자들에게 모든 것은 조급하다. 이 사람의 마음이 변할까, 이 사람의 마음이 다칠까, 그 사람의 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만큼 정보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여유가 없다. 주저하고 망설이는 이유가 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은 저만치 앞서 나가고, 주인공들은 거짓말을 시작한다.
남자 친구와 새로운 남자가 함께 뛰고 있는 농구 동호회의 회식에 함께 참석한 이정인은 식당 바깥에 있는 화장실을 들르려다 유지호를 마주친다. 아들과 통화를 하며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유지호를 보며 이정인은 자신은 거짓말하는 걸 싫어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유지호의 직업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남자 친구 앞에서는 그 사실을 숨기는 거짓말 장면이다. 유지호는 이를 자연스럽게 감싸주는 거짓말을 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거짓말 장면이 등장한다. 그 상황들의 거짓말은 본능에 가깝게 순간적인 판단으로 튀어나온다. 그렇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는 거짓말도 아니다. 거짓말을 하는 이들을 악인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남자 친구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분명히 악한 행동일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꿈꿔왔으나 정말 자신의 일이 될 줄은 몰랐던, 진짜 사랑을 시작하게 되지만 그 시작은 곧 인생의 사건사고의 시작이 된다.
그 둘에게 ‘사랑에 빠진다’는 기적이 일어난 것은, '빠진다'는 표현 문자 그대로 동시에 ‘추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항상 당당하고 확실했던 이정인은 거짓말을 하게 되고 숨기게 되며 그러다 보니 분명한 행동을 하지 못한다(물론 그 과도기를 거쳐 분명한 행동으로 이르지만. 그 분명함이 모두의 공감을 얻는 분명함은 아니다). 그녀 스스로도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그때그때 바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러 번 등장하는 표현대로 ‘바보’가 되고, ‘흐리멍덩’ 해진다. 드라마 서두에 나오는 것처럼 이정인은 다행인지 별다른 사건사고 없이 적당한 연애를 하고, 적당한 평판을 유지하며 무탈하게 살아왔다. 앞으로의 추락을 예고하듯 후배 직원은 이렇게 얘기한다(역시 맥락상 정리). ‘연애 문제만큼 인생에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건 없다!‘.
이정인은 유지호와의 연애를 시작하며 본격 사건사고의 세계로 입문하게 되고, 평판은 땅에 떨어지게 된다. 극 중 가장 친한 동료의 대사처럼 누가 봐도 남자 친구는 피해자로 보이고, 이정인은 ‘나쁜 여자’인 상황이 된다. 남자 친구가 무조건 나쁜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는 점 또한 꽤나 현실적이다. 그렇지만 ‘나쁘지 않은 사람’인 것이 ‘좋은 사람’인 것일까? 그도 다른 사람과 만난다면 그녀에게 ‘좋은 사람’ 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정인과의 관계에서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누구도 연인 사이의 진짜 속내는 알 수 없다. 그는 충분히 괜찮고, 나쁘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녀를 충분히 존중하며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이정인이라는 사람의 진면목을 끝끝내 알지 못했다.
이정인은 자신에게 진짜 ‘좋은 사람’을 선택한다. 그 선택은 이제껏 겪지 못한 추락을 수반하지만, 한편으로는 똑똑한 선택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었고,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을 용기가 있었다. 부모님께 끼치는 실망감, 남자 친구에게 주는 상처, 그로 인해 자신이 겪게 될 고통과는 별개로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그때까지는 몰랐을)인 ‘사랑’을 선택한 것이다. 그 상대가 자신에게 꼭 맞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에. 다만 이를 얻는 과정은 산뜻하지 않다. 오히려 구질구질한 것에 가깝고, 드라마 봄밤은 이를 너무나 현실에 가깝게 그려낸다.
유지호는 어떤가. 한국 드라마에서 아주 무게 있게 그려지지는 않았던 캐릭터인 미혼부이다. 단순히 극의 갈등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에 그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정인이라는 삼십 대 중반의 여성이 아버지로 대변되는 사회적 통념을 어떻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복해 나가는지를 보여주지 않을까. 이를 세세하게 파고들기에는 아직 드라마의 후반부가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전이라 섣부른 판단이 될 수 있다. 이 설정과 관련된 내용은 후반부의 전개를 통해 그 의미를 좀 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소 나이브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이 있는가, 라는 문제로 일단 생각해본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그건 그림자이기만 할까. 모든 관계가 상대적이라면 그 그림자도 누군가에는 빛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하고.
어쨌든 드라마의 현실 속에서 유지호 역시 추락한다. 그가 처한 상황으로 인해 그는 이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았을 수모와 고통을 겪게 된다. 자신의 세계 밖으로 아주 어렵게 한 걸음 내디뎠는데 그에게도 추락이 따른다. 아마도 후반부에는 더 큰 고통이 뒤따를 것 같다. 그렇지만 삼십 대 중반의 그는 용기 있는 선택을 했고, 자신의 알을 깨고 나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아빠를 넘어선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다.
"사랑에 빠질 때 그것을 이룰 가능성을 미리 헤아려야 하는 걸까. 이 문제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는 안 되겠지. 어떤 계산도 있을 수 없지.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니까. 우리가 사랑에 빠졌다면 그냥 사랑에 빠진 것이고 그게 전부 아니겠니. 그러니 실의에 빠지거나 감정을 억제하거나 불빛을 꺼버리지 말고, 맑은 머리를 유지하도록 하자. 그리고 신이여, 고맙습니다. 나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고 말하자."
봄밤 23회에 등장한 책 낭독 씬 /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지>라고 한다.
이정인의 동생 이재인의 대사 중에 인상 깊은 것이 있었다. 남자 친구와의 이별을 이제 시작한 언니에게, “연애는 서로 몰랐던 민낯의 바닥을 봐야 끝나”라는 대사. 이별의 선언이 연애의 끝이 아니라, 선언 이후 서로가 만날 동안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바닥을 봐야만 끝이 난다는. 무척 공감이 갔다.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사랑은 ‘서로 몰랐던 민낯의 바닥마저 안아주고 싶은 것’이라는. 사랑에 빠져 버린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그 민낯의 배경과 이유가 궁금하고, 그걸 이해해 보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 서로를 향한 착한 마음을 믿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서로를 짠하게 여기는 마음, 그래서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건(미운 순간은 있더라도), 분명 작은 기적이다.
어른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건 ‘적’이 있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 일지도 모른다. 내가 누군가에게는 아주 ‘나쁜 인간’ 일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 서로 살자고 하는 행동인데,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도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해 서로가 질 책임의 무게와 과정은 상당히 무겁고 씁쓸하다는 것.
봄밤의 주인공들은 ‘나에게도 누가 있을까?’라고 생각했을 때, 뜻밖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 그로 인해 그들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면서 어른이 되어간다. 자신이 힘겹게 쌓아 온 여러 가지 것들을 잃게 되기도 한다. 그래도 사랑을 선택한다는 것은 이를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 나는 위로를 받는다. 합리적인 계산으로는 바보 같아 보이는 선택일지라도, 사랑 자체는 언제나 옳은 선택이라고. 여러 고구마 같은 상황이나 전개에도 불구하고, 내가 봄밤을 아직까지는 시청하고 있는 이유다. 맥주 한 캔과 함께 :)
(2019년 7월 2일 작성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