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Nov 10. 2021

<스토너>, 넌 무엇을 기대했나

I did it my way

얼마 만에 큰 노력 없이 완독 할 수 있었던 '장편소설'이던가. 오로지 '재미있게' 읽었다. 책장이 훌훌 넘어가고, 시간도 그만큼 빨리 갔다. 책장에 꽤 오래 꽂혀있었으나 읽지 않았던 책.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1965) 얘기다.


언제부터인가 소설은 잘 읽히지 않았다. 몰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내 삶도 쉽지 않은대 소설이라는 커다란 세계에 들어가 감정이입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다른 책 보다 소설이 더 어려웠던 것은 특히나 인물, 상황에 쭉 집중하며 따라가야 한다는 것인데, 그 이야기를 따라갈 만큼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책뿐만 아니라 영화도 그렇다. 예전에는 집에서도 영화를 잘 봤는데, 이제 영화관이 아니면 집에서 한 작품을 끝까지 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하여 근자에는 맥이 끊겨도, 앞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도 무리 없는 독서가 가능한 에세이 종류를 많이 읽었다.


존 윌리엄스 장편소설 <스토너> /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

이런 상황에서 책장에서 고민 끝에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과연 집중이 가능할 것인가 의구심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집중이 됐다. 그야말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갈 때의 그 느낌. 얼마만인지. 재미있는 것은 스토너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엄청나게 스펙터클 하다거나 그 이야기를 통해 뭐 대단히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진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은 윌리엄 스토너라는 인물의 출생부터 죽음까지를 거의 시간 순으로 그려내고 있다. 평범한 한 인물의 생애에 펼쳐지는 일, 사랑, 우정, 결혼, 자식, 병듦,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담담한 어조로 서술된다.


그런데 작가의 관찰력이 얼마나 섬세하고 예리한지, 에피소드 - 특히 로맥스, 찰스 워크, 이디스와 관련된 - 에서 보이는 미묘한 감정선들이 끊임없이 긴장감을 갖게 하고, 다음 장면들은 어떻게 전개될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관찰이 깊고 생생하여, 가장 깊은 것들은 언제나 통하듯이, 지금의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공감하며 읽어 내려가게 될 것이다.


스토너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장면이 나온다. 스토너의 삶은 언뜻 보기에 실패한 삶, 슬픈 삶처럼 느껴진다. 얼마간 슬프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냐만은, 주인공의 관점에서 책을 읽는 동안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스토너는 일견 ‘당하며’ 사는 듯 보인다. 통쾌한 복수나 극적인 반전은 없다. 이걸 이대로 끝까지 읽어도 될지, 비극이면 너무 속상할 것 같은데.. 이런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됐다. 그래서 엔딩이 궁금했다. 그것이 내가 앞서 읽으며 느낀 것들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알게 해 줄 것 같아서.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나도 모르게 찡한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어 책을 덮고 곱씹어 보았다. 그의 삶은 외로웠고, 슬펐다. 부당하거나 억울한 경험을 하고, 그것을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삶은 진짜 승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서두에 나오는 것처럼 "노장 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중요하지 않다.


 스토너는 ‘보이기 위한’ 삶을 살지 않는다. 초라해 보이지 않기 위해, 이기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가고자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자신의 방식대로 산다. 친구도 적도 가족도 누구 하나 제 편이 아닌 상태로 살아가는 힘든 시절에도 초라해 보이든 불쌍해 보이든, 어떤 상황에서든 할 수 있는 일들을 해가면서 그 자신인 채로 살아간다. 수동적으로 ‘참기만 하는’ 삶으로 보여 안타깝기도 했지만, 끝까지 읽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조용하고 성실한 사람으로서 그 자신의 방식대로 대응하며 살아간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외부의 공격에 쉬이 자신의 중심에서 발을 옮겨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보다는, 자신의 모습인 채로 꿋꿋이 중심을 지키는 모습. 물론 그것이 항상 옳다고만 보기도 어렵고,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호흡대로 살아가는 것이 묵직한 단단함으로 느껴졌달까.


“몸은 강해.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해. 항상 계속 살아가려고 하지”라는 그의 독백처럼 그는 ‘계속해서’ 살아가려고 했다. 이보다 더하게 밑바닥으로 떨어질 순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살아내고 또 살아낸다. 그는 정신이 혼미한 마지막 생의 순간까지 생각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묻는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생각한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내가 내 삶에 기대했던 것들은 무엇이었나. 그중의 태반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낯선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나를 생각하며 가장 속상한 건 스스로의 모습으로 살아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서른 살 이후 나는 솔직한 내 모습으로 살지 못하였다. 주어진 상황 때문이기도 하고, 나의 선택 때문이기도 하다. 어찌 됐든 내 모습은 내가 선택한 것이니까, 상황만을 핑계 삼을 수 없다. 나를 지우고 때론 억지로, 때론 자발적으로 나를 세상에 맞춰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옅어지고 껍데기가 시커멓게 남았다.


그 삶의 흐름이 잠시 끊기고 나를 돌아볼 시간을 갖게 된 것이 작년 가을의 일이다. 나의 그대로의 모습을 발견해주고 받아들여 주는 남편이 있어, 이 시간을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보낼 수 있다. 남편이 아니었다면 나는 껍데기만 남은지도 모른 채 살아갔을지도 모르지.


스토너의 스승인 아처 슬론의 충고로 마무리해야겠다.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기로 선택했는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잊으면 안 되네.
인류가 겪은 전쟁과 패배와 승리 중에는 군대와 상관없는 것도 있어.
그런 것들은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 않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할 때 이 점을 명심하게.


아, 하나 더. 책장을 덮고 나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가 떠올랐다. 스토너의 삶이 마치 이 한 곡의 노래에 다 담겨있는 것만 같다.


"(..)


When i bit off more than i could chew

But through it all when there was doubt

i ate up and spit it out

i faced it all and i stood tall

And i did it my way

i've had my fail, my share of losing

and now as tears subside

i find it all so amusing

to think i did all that

And may i say not in a shy way

I did it my way

For what is a man, what has he got

if not himself then he has naught

to say the things he truly feels

And not the words of one who kneels

the record shows i tooked the blows

and did it my way

Yes, it was my way"


(2019년 4월 9일 작성 완료)


이전 02화 <봄밤>, '사랑에 빠진다'는 추락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