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기적이라고 믿는다
예전에도 쓴 적이 있는 감사일기의 일환이다. 삶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잊는 순간, 온갖 크고 작은 고통도 시작된다는 것을 이제는 경험을 통해 안다 :)
# 지방에 산다는 것
아주 추운 한겨울만 아니면, 주말 오전을 여유 있게 보내고 오후 즈음에라도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보성 대한다원으로, 육회를 맛보러 함평으로, 낙지로 기운을 돋우고자 목포나 무안으로, 떡갈비를 먹으러 담양으로 갈 수 있다. 조금 더 부지런을 떨어 일찍 움직이면 순천만 국가정원도, 전주 한옥마을도 우리를 기다린다. 여수에는 밤바다가 있는데 그러려면 1박은 해야 한다. 아, 1시간 거리 고창 상하농원도 빼놓을 수 없다.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인 우리도 덩달아 즐거운 곳이다. 매년 계절마다 그 매력을 조금씩 달리하는 지역들을 띄엄띄엄 두루두루 다니다 보면 1년이 훌쩍 지나고, 그만큼 아롱다롱한 추억들이 켜켜이 쌓인다.
이점만 있으랴. 사실 불편한 점들도 많다. 하지만 이런 확실한 이점들이 지금의 우리 가족에게는 아주 귀하다. 아이 인생의 한 번뿐인 유년시절에 이를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 지금 내게 느리고 순한 일상이 흐른다는 것
아이를 가정 보육하며 보내는 하루는 아주 느리고 길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그래서 답답할 때도 너무 많지만), 에너지가 허락하는 날에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산책하고 싶을 땐 언제든 아이와 공원 산책을 할 수 있다는 것, 눈이 오거나 비가 와서 나가고 싶지 않을 날엔 집에 있을 수 있다는 것(집에서 내린 커피를 따뜻하게 마시고, 선곡한 음악을 들으며 내리는 눈과 비를 보고 듣는 시간), 먹고 싶을 땐 간단한 재료로 부침개를 구워 내 입맛에 꼭 맞는 이 지역 막걸리와 페어링 하여 먹을 수 있다는 것.
밤에 다음 날 할 일이나 해야 하는 말들을 시뮬레이션하지 않고 잠들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험담하거나(험담을 듣거나) (얄)미워하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 평가받지 않는다는 것. 매일 아침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것. 이 모든 자그마한 일상이 얼마나 귀한 호사인가하고.
정말 별 거 아닌 이 소소한 것들이 불과 몇 년 전의 나의 라이프 스타일로는 이루기 쉽지 않았다.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그러기에는 나의 에너지가 너무나 부족했다. 이런 방식의 삶이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진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온전히 누리자는 마음. 향후에도 지금의 삶의 방식을 큰 틀에서는 유지하는 선택을 하고 싶다는 생각. 아마도 덜 벌고 덜 쓰는 삶일 것이다. 대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나다운 시간은 좀 더 많은. 더불어 나 자신을 단정 짓기보다는 생각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걸 기억하기로.
# 소설과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2021년 독서 리스트를 정리한 브런치 다른 글에서도 잠깐 썼지만, 꽤 오래 소설이 읽히지 않았다. 영화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주로 예능이나 취향에 맞는 드라마 위주로만 시청했다(영화와 소설의 존재와 상관없이 예능 프로나 드라마는 나한테 너무 중요한 것!). 그만큼 집중도 몰입도 쉽지 않은 환경이었는데, 아이 두 돌이 지나면서 거짓말처럼 소설이 읽히고 영화를 집중해서 보게 됐다. 물론 마침 보게 된 소설과 영화가 너무 탁월했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어렵게 다시 이 감각적인 호사의 기쁨을 느끼며 깨달은 점은 '무언가에 완전히 빠져들어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상태는 얻기 쉬운 게 아니라는 것. 이런 것들이 숨 쉬듯 당연했던 20대, 그리고 이 모든 것들과 서서히 멀어졌었던 30대를 지나면서 '당장은 쓸모없고 방해만 되니 잘라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내 안에서 다시 쓸모를 찾게 된 것이다. 무쓸모의 쓸모라고 해야 할까. 오롯이 이런 것들을 느끼는 원래의 나 자신이 아주 조금씩 찾아지는 기분. 그렇다고 조급해하거나 서두르려 하지는 말자. 차근차근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내는 그 무언가가 가치 있다.
하루하루 버겁기도 하고 종종 울적해질 때도 있지만 요즘의 감사를 기록에 남기면서 다시 생각해본다. 내가 오늘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 아닌가 하고. 이거 정말 그렇지 않은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