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이탈리아 퓨전 갤러리 레스토랑
팔뚝만한 아이가 떨어질까 두 손을 떨며 아이를 품에 꼭 안고 산후조리를 시작한 날부터 아이의 네 돌까지. 참말로 파도 같은 날들이 지나갔다. 그 날들이 지나는 동안, 더디지만 우리 부부 사이에 깊고 깊은 전우애와 맑은 사랑과 신뢰가 뿌리를 내렸다.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조금씩 흩어졌다. 결혼은 생각보다 낭만적이지 않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깊음을 품는 것이더라. (결혼하고 알게 되었다. 결혼에 대한 나의 상상이 얼마나 빈약한 것이었는지)
부족하여 덜 먹이면 덜 먹인대로, 풍족하여 넘치면 넘치는대로 부어준 음식과 언어와 손길을 받고 무럭무럭 자란 아이가 네 돌이 된 날, 보메청담에 갔다. 미식가들과 예술애호가들의 칭찬세례를 받으며 성황리에 오픈한 갤러리 레스토랑, 보메청담.
지난 봄, 지독한 무기력과 위협적인 허무주의에서 날 구원해 준 현대미술 전시커뮤니티 '아이아트유(I.ART.U)'의 한 회원 분이 수업 중에 언급하셨던 식당이라 메모해 두었다가 아이의 네 번째 생일에 찾아온 것이다.
보메청담
Cheongdam Bome
아이 생일이지만 아이는 기억도 못할 그 날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욕조나 수영장에 입수하지 않는 나에게, 터진 양수로 아래가 축축해진 그 날의 경험은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장면이다. 그 날부터 온전히 4년간 엄마로 살아온 나를 축하하러 온 것. (미안, 아가. 이 날은 엄마가 다시 태어난 날이기도 해.)
한여름의 더위가 아직 가시질 않았건만 보메청담의 인기 예약석, 테라스 자리는 만석이었다. 우리도 예약한 대로 테라스 자리에 앉았지만 두 가지 이유로 실내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원체 열이 많은 아이가 테라스의 멋 따위를 느끼며 식사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과 테라스석에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보메청담의 실내 고급 예술작품들을 보기 위해서.
갤러리야? 식당이야?
실내로 자리를 옮기는 동안 천천히 걸으며 양혜규 작가와 OK-RM이 협업해 선보였다는 벽지 작품 '이모저모 토템' 시리즈를 봤다. 정확히 1년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양혜규 작가의 개인전에서 말로 표현못할 위력에 압도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높은 천고에 걸려 있는 김지민 작가의 대형 해골 작품이 이목을 끈다. 카운터 근처에는 3m에 달하는 프랑스 설치미술가 장 미셸 오토니엘의 유리구슬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준비된 테이블로 걸어가는 동안 벌써 황홀한 예술의 경험으로 배고픔을 잊게 된다. 보메청담의 테이블 셋팅을 제외하면 전시회를 선보이는 갤러리로 착각할 수 있을 만큼 공간 자체도 멋짐 그 자체다.
하지만 벽과 천고에 설치된 작품들만 보고 놀라면 보메청담 측은 여러모로 섭섭할 것 같다. 실내 다이닝 체어와 테라스 체어의 디자인은 각각 양태오 디자이너와 벨기에 아웃도어 가구 브랜드 트리뷰의 체어라고 한다. 고급스러움의 극치다.
잠시 들어가 본 화장실의 거울과 꽃조차 손님을 홀린다. 다니엘 아샴의 브로큰 미러 앞에서 서서 한참 동안 얼굴을 쳐다봤다. 보메청담 곳곳을 돌아다니며 흔하게 보이는 생화가 화장실에도 한가득, 꽃병과 비누받침 등의 장식품들이 예사롭지 않아 볼일을 다 본 후에도 자꾸 쳐다보게 된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심심치 않게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식당.
대체 어떤 아트컬렉터가 이런 고급예술과 함께 근사한 인테리어의 식당을 청담동에 선보이게 된 걸까? 20여년 간 의류업을 해온 보메청담 대표가 컬렉팅을 시작한 건 4~5년밖에 되지 않는단다. 자신의 의류브랜드 보메를 론칭하면서 소장품과 함께 레스토랑 겸 보메의 쇼룸을 오픈하게 되었다는 것. 높은 안목과 멋진 배포에 입이 벌어진다.
식사는 어떨까?
그래 뭐니, 뭐니 해도 메뉴개발자 남편과 함께 간 식당인데 가장 궁금한 건 메뉴 라인업과 맛. 우리가 주문한 메뉴들은 이러했다.
홍시부라타
가지라자냐
화이트라구
마라파스타
에그타르트 (아이 생일케이크 용도)
화이트와인
이태리 식품을 다루는 남편이기에 치즈가 넘쳐나는 우리집 냉장고에도 뜸하게 있는 부라타와 페타. 그래서 '부라타'가 들어있는 메뉴는 일단 고르고 본다. 2년 전 육셰프키친에서 육셰프토마토소스를 판매할 때 유난히도 자주 사갔던 한 고객이 토마토소스로 '가지라자냐'를 자주 만들어 드신다 한 게 생각나 가지라자냐도 추가. 느끼한 '화이트라구'도 추가. 마라탕과 마라샹궈를 사랑하는 우리, '마라파스타' 맛은 어떨까 너무 궁금하여 또 추가.
아이 생일인데 케이크를 안 샀네? 에그타르트에 초 꽂아서 해주지 뭐, '에그타르트' 추가. 파스타에 와인 빠지면 나도 섭하고 파스타도 심심하고 와인도 슬퍼하니 '화이트와인' 한 잔 추가.
마라파스타는 생각보다 마라향이나 맛이 많이 안나 아쉬웠다. 찐 마라맛을 기대하고 주문한 손님들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을 맛, 하지만 마라맛에 대한 선호도도 천차만별이니 어떤 이들은 연한 마라맛을 즐길 수도. 화이트라구는 우리 부부 둘다 엄지척! 했지만 가지라자냐는 자연식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만 맞는 듯했다.
화이트라구와 화이트와인의 조합은 광안대교의 밤을 보며 먹는 회의 맛과 꼭 같았다. 이 때가 8월이었는데 지금까지도 이 맛을 잊지 못해 남편에게 '그 날 그 화이트와인'을 이야기한다. 맛을 음미하고 기쁘게 추억하며 말하는 일이 얼마만인지. 이토록 충만한 식사를 매일 세 번씩 아니 단 한 끼라도 해낼 수 있다면 그 삶, 참 축복 받은 삶이라 할 수 있겠다.
작품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이런 멋진 식사. 보메청담이 잘될 아니 잘 되어야할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곳에 방문해 식사하는 모든 이들이 황홀하고 근사한 한 끼를 만끽하길, 식사 중 깊은 영감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삶에 활력이 생기길.
이렇게 아이 생일에도, 내 생일에도, 남편 자신의 생일에도, 결혼기념일에도 결국은 나를 위한 식사를 준비해 주는 남편에게 고마운 날들이다. 남편의 기꺼운 배려 속에 서른의 중반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