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 달리X디즈니, 권오상
한번은 클림트의 명화 <키스>와
엘가의 <사랑의 인사>가
접목된 사운드북을 갖고 놀다가
가만히 눈물을 흘리는 딸 아이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 <엄마라는 유산> 中
(<엄마라는 유산>은 2020년 1월 제가 공저자로 참여해 출간한 에세이입니다.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말씀드립니다.)
아이가 태어난 2017년 8월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이와 날 스쳐간 그림은 몇 점 정도 될까. 그림과의 추억이 점점 많아지는 우리 모녀.
돌이켜 보면 정말이지 우리 사이, 그림이 있어 다행이었다.
처음 서본 자리, 엄마의 자리는 늘 내게 버거움과 알 수 없음이었고 그렇게 허둥지둥대기에는 아이가 무척 소중하고 사랑스러웠다. 아이에게 다정한 언어와 사랑의 표정과 따뜻한 지혜를 전하고 싶었지만 엄마가 되었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자애로운 여인이 될 리 없다. '좋은 엄마'에 이르기 위한 모든 과목에서 난 평균 이하의 성적을 받는 듯했다. 생후 반년도 안되었을 때 이미 엄마 효능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배밀이를 해내며 날 보고 방긋 웃는 아이와 그림으로 소통하기 시작하면서 엄마 자존감, 그 비슷한 심리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그림을 보여주며 이야기하는 내 모습이 꽤 나답다고 여겨졌다.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켜 온 예술을 아이의 언어로 말해주는 엄마, 그런 엄마라면 요리 좀 못하고 장난감 좀 못사줘도 괜찮은 것 아닐까 생각하면서.
그간 아이의 마음에 들어온 작품들이 꽤 된다.
아이는 그때마다 부족한 언어 실력으로 자신만의 감상을 이야기하고 싶어했고, 그도 안 된다면 레고, 클레이, 그림, 노래 등 온갖 방법으로 감동을 표현해 왔다. 그 많은 작품들 중 세 작품 정도를 기록해 보려 한다.
the Kiss (1907~1908)
Gustav Klimt (1862 ~ 1918, Austria)
아이들이 이 작품(the Kiss)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우려하는 부모도 있다. 하지만 화가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기우가 아닐까 싶다. 아이들은 미적으로 충만한 작품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작가가 의도한 많은 부분을 받아들인다.
<아이 스케치북에 손대지 마라> 中
두 돌이 안 되던 무렵 50여 권에 달하는 영유아를 위한 명화음악 그림책 전집을 구입했다. 내게 영어나 수학보다 더 중요했던 명화의 세계, 창작동화보다 더 읽어주고 싶었던 예술 이야기. 인류에게 정신적 유산과 예술적 영감을 선물해준 대가들의 걸작을 아이의 눈에 익숙하게 자주 보여주고 싶었다. 온갖 캐릭터와 애니메이션을 접하며 자라게 될 아이가 혹 명화들이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그림이라고 여길까봐, 명화를 거부할까봐 부지런히 명화를 보여줬다.
명화와 클래식을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제작된 사운드북을 갖고 놀다 가만히 눈물을 흘린 두 돌 즈음의 딸 아이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그려져 있고 버튼을 누르면 엘가의 <사랑의 인사>가 흘러 나오는 페이지에서였다. 오스트리아 빈 국제공항에 클림트의 <키스>를 보지 못했다면 빈을 떠나지 말라는 문구가 있단다. 어마어마한 그 그림을 본 아이의 반응.
유채와 금박 기법을 사용해 무척이나 화려한 이 그림 앞에서 엘가의 음악을 들으며 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기저귀를 찼고 말문도 트지 않은 아이였다. 왜 우는지, 무엇이 슬픈 건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키스> 앞에서 가만히 아이를 안아주며 몇 분을 멍해있던 기억이 난다. 외설스러웠던 클림트의 삶을 떠올리며 무심하게 그림을 바라보던 나를 일순간 작게 만들어 버린 아이의 눈물.
다섯 살, 여섯 살이 되어 수다쟁이가 된 아이는 우연히 <키스>를 볼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나 아기였을 때 이 그림 보고 울었었잖아. 기억나지? 나 그 때 슬퍼했었잖아. 기억나? 그 음악이랑 같이."
Destino (2003년 개봉)
Walt Disney X Salvador Dali (1946년 합작 시도)
시간이라는 미로에서 생의 문제를 마법처럼 펼친 작품 (A magical display of the problem of life in the labyrinth of time)
Destino에 대한 달리의 설명
대사도, 줄거리도 없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십수 회씩 보는 아이. 보고 또 보고, 말하고 또 말하고. 지난 겨울, 초현실주의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 전시회 말미에 상영된 DisneyXDali 합작 단편 애니메이션 <Destino(운명)> 앞에 선 딸 아이 말이다. 밥 먹을 때도, 외출해서도, 미술놀이할 때도 아이는 이 애니메이션을 수없이 봤다. 5세 끝무렵이었다.
<Destino>는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두 아티스트, '디즈니'와 '달리'가 1945년에 합작하여 기획한 단편 애니메이션이다. 기획과 제작 초기 과정 이후 발발한 2차 세계대전 탓에 묻혀있던 스케치 작업이 2003년 개봉되면서 주목받은 작품. (2003년 아카데미 최고 단편상 후보)
시간의 신 '크로노스'와 인간 여자 '달리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대략적인 주제다. 작품의 배경은 달리의 초현실주의 회화라 신비롭고 심오하다.
딸 아이는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며 '달리아'가 보여주는 부드러운 곡선미, 풍부한 감정선, 뚜렷한 이목구비, 초현실적인 행동과 몸짓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듯했다. 몸짓을 따라하고 싶어했고, 스케치북에 그리고 싶어했고, 그녀의 마음을 알고 싶어했다. (그녀의 마음을 조금도 알 수 없는 엄마라 미안)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옆으로 와서 <Destino> 이미지들을 보며 가만히 웃는 딸 아이 덕분에 오래, 자세히 감상하게 된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무제의 G-Dragon, 이름이 비워진 자리 (2015)
권오상 (1974~)
'혼자 간편하게 작업할 수 있는 조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게 대학 내내 저를 사로잡고 있던 생각이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서점에서 종이접기 책을 보게 됐고, '사진을 구부리거나 접으면 입체가 되겠구나' 생각해서 사진조각을 시작하게 됐죠.
지식구독채널 '아홉시'의 권오상 작가 인터뷰 中
수천 장의 사진을 스티로폼 조각에 차례로 붙여 나가며 입체 형상을 만드는 작가, 권오상. 사진으로 조각을 한다 하여 사진조각가, 카메라로 조각하는 작가라고도 불린다.
전시모임 커뮤니티에서 도슨트 선생님께로부터 처음 알게 된 작가였는데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찾아갔던 서울대 미술관의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전시에서 그의 작품을 아이와 함께 보게 되었다.
어른의 눈에도 신기하고 놀라운 권오상 작가의 사진조각 작품은 아이의 눈에도 독특하고 참신해 보였나 보다. 사진이 겹겹이 붙여진 모양새, 실제 사람 크기만한 조각의 크기, 사진 표면의 광택감 등이 아이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작품 가까이에서 작품의 이모 저모를 빤히 쳐다보더니 어떻게 만든 것인지, 누구를 만든 것인지 질문을 쏟아냈다.
권오상 작가의 사진조각을 본 이후로 찢어 놓은 색종이와 천 조각으로 콜라쥬하기를 즐긴다. 사진을 뽑을 수 있는 카메라를 사주면 다 이어 붙여서 자기도 전시를 하겠다고 한다.
아이는 평면회화보다 입체 작품들을 만날 때 유독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보인다.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보다 실험적 재료들이 쓰인 작품에 대해 궁금해 한다. 데비 한의 비너스 시리즈를 볼 때도 그랬고, 위영일 작가의 커다란 설치 작품, 머리카락으로 사실적인 그림을 표현한 황재형 작가의 작품을 볼 때 그랬다.
아이와의 전시회 추억이 깊어질수록, 미술과 관련해 아이와 나눌 수 있는 대화가 정말 무궁무진함을 깨닫는다. 작가가 천착하고 있는 세계, 주로 다루는 재료, 재료를 활용하는 창의적인 방식을 접할 때 아이의 사고가 한계 없이 확장될 수 있음을 느낀다.
더 나아가 작품을 보며 자신의 어린이집 일상, 놀이 주제, 우리 가족 일화를 연결지어 이야기할 때면 그간 함께 해온 시간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 너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우리 앞에 남겨진 인생의 수많은 날들에 또 어떤 작품들이 아이를 통해 내 삶으로, 나를 통해 아이의 삶으로 들어오게 될지 기대하는 마음이 가득 부풀어 오른다. 아이의 말을 따라, 우리가 눈송이가 되어 하늘에 소풍 나가는 그 기분으로.
2022.04.30
아이를 통해 내 삶으로 들어온
몇 가지 소중한 작품들을 기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