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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너조이 Jul 25. 2022

서재 예찬

나 자신과의 우정을 지키게 해준 곳


이렇게 꾸민 끝에 서재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비밀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지 하나가 묻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 그가 질서 있는 모습으로 정리하던 것도, 현실 속에 실현하고 있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 존 윌리엄, <스토너>



서른 일곱 즈음 되니, 

내 삶이 서재라는 공간에 빚져왔음을,

알게 된다.


내 삶에 무수한 어휘를 쌓아준 곳, 나 자신과의 우정을 지키도록 해준 곳, 일상을 뒤흔드는 가정의 아픔을 순식간에 흩어준 곳, 고독한 삶을 즐기게 된 취향의 뿌리가 된 곳, 글자와 숫자가 어우러진 세계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서재. 그래서, 이러한 이유로, 이 감사한 마음 때문에, 대학원과 연구소 생활을 종결한지 10년이 넘도록,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집이 비좁아지도록, 서재 공간을 포기하지 못한다. 아니, 포기하지 않는다. 네, 포기란 없습니다.






이사를 한 달 앞두고 구축 아파트 리모델링과 홈 스타일링에 영혼을 수놓고 있다. 남편의 공간인 '주방'과 나의 공간인 '서재'를 평면도에 수없이 그린다. 이 두 공간에 딸 아이의 삶이 포근하게 녹아들 수 있도록 하루에도 수십 차례 따뜻한 생각을 품는다.   


이사 전 책장의 짐을 한 번 더 덜어보려 이 책, 저 책을 쓰다듬고 책기둥들을 괜히 한 번 손으로 짚어보니 이 책들과 함께 했던 10대, 20대 그리고 이제 저물어 가는 30대의 책 공간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점점 잃어가는 기억들 속에 '책 공간'에 대한 기억 파편은 무지하게 선명하다.   


비밀스럽고도 활기찬 서재. 


유망한 10대 소녀였던 시절에는, 책상의 디테일이 참 중요했다. 아직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던 때, 전교 상위권 석차를 유지하는 일이 더 우선이었던 그 때, 교과서와 참고서, 문제집을 서로 간섭 없이 펼칠 수 있는 넓고도 실용적인 책상을 갖추어 놓는 것이 좋았다. 책장이 전면인지, 측면인지의 여부와 서랍의 구성 등. 가족이나 친구 앞에서보다 책상 앞에서 더 명랑했던 나를 기억한다. 학교가 끝나고 얼른 돌아와 그 날 저녁 공부할 내용을 플래너에 정리하는 일이 기뻤다. 



10대의 이너조이는, 이 책들을 좋아했어요.

1) 갈매기의 꿈
2)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3) 레 미제라블
4) 호밀밭의 파수꾼
5) 두 도시 이야기



방다운 방을 갖지 못했던, 내 인생 가장 처연했던 20대. 책 공간이 없던 집보다 대학원 연구실이나 연구소 내 자리가 더 편했던 그 때. 그 때는 몰랐는데 지금 돌아보니 왜 내가 오랜 시간 우울한 기질의 사람으로 변모했는지 잘 알겠다. 안락한 공간 하나 갖지 못한 사람은 그만의 빛을 잃게 되나보다. 고유의 에너지를 상실하나 보다.   



대학원생 이너조이는, 이 책들을 좋아했어요.

1) Nothing to Envy
2) 우리 안의 파시즘
3) 사랑 후에 오는 것들
4) 연금술사
5)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스물 여덟, 침실과 별도로 서재라는 공간을 다시금 되찾았는데 20대에 잠시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라면 꼭 이 때이다. 20대 내내 미루어두었던 인문학과의 풍성한 만남이 이 때부터 결혼 전까지 이어졌다. 꼭두새벽 같이 일어나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북서울꿈의숲으로 나가 아침의 고요한 산책을 즐기는 한편, 아침과 낮 시간의 독서와 글쓰기 시간은 애처롭던 20대를 위로하며 서른의 결혼을 잘 준비하도록 도왔다.    

 


결혼 전의 이너조이는, 이 책들을 좋아했어요.

1) 인생 수업
2)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3) 코끼리와 벼룩
4) 수상록
5) 우울한 열정



일하며 돈 버는 일에는 젬병이어도, 초월적인 성실을 발휘해 읽고 쓰는 루틴을 지키고 싶어하는 나에게 남편은 선뜻 신혼집의 방 한 칸을 서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줬다. 출산 후 아기의 짐으로 집이 비좁아지자 이번에는 거실을 서재로 쓰자고 제안했고 남편은 묵묵히 대형 책장들과 전면책장, 책상을 거실로 옮겨 주었다. 고맙습니다,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해서요.



결혼 직후 이너조이는, 이 책들을 좋아했어요.

1) 기억 꿈 사상
2) 계속해보겠습니다
3) 희랍어 시간
4) 야만적인 앨리스씨
5) 컬처 케어






주기적으로 책장을 정리하고 책상을 정돈하며 든 생각. 참 오랜 시간 동안 난, '서재'라는 공간을 통해 나 스스로를 규명하고 싶어하고 나란 존재를 들여다보고 싶어했구나. 책장에 꽂힌 책들이 주로 어떤 주제를 향해 있는지, 종국에 내 삶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지 틈틈이 살펴왔다. 다독을 하거나 책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단 한 권을 읽더라도 날 좀더 생성적인 삶으로, 누군가를 더 이해할 수 있는 인생으로 인도해 주길 바랐다.


인간관계도 짧을 뿐더러 인맥관리라는 것도 참 못하는 나인데, 책장 정리는 참말로 성실했네. 사람한테는 그만치도 못하면서, 책 한 권과의 인연은 끈질기게 붙드는 나 자신에게. 이제 좀더 폭넓은 독서를 하길 바라. 새롭게 만들어질 공간에서 독서가로서의 새 삶을 맞이하게 되길 진심으로 바라.  


그나저나,

책상 위 조명은 무슨 타입으로 하지?



2022.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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