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박사》 개봉 기념으로 강동원이 나왔던 영화를 다시 볼까 하다가 이 영화가 생각나서 찾아보게 되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조금 겉멋이 든 영화가 이런 걸까 생각하며 봤는데, 지금 보니 본인도 뭐라 콕 집어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느낌을 최대한 표현하려 고군분투한 결과가 이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직관이 중요한 영화.
영화에서 거울이 많이, 그리고 자주 등장한다. 인물들이 거울에 비침으로써 파편화된다. 씬들도 파편화되어 있다. 이를 통해 혼란스러운 인물들의 감정을 전달하고 그 자체로 기억과 기억 속 감정을 재현한다. 기억이란 것은 온전하지 않다. 조각조각이 나서 기억되며(심지어는 왜곡된 기억도 상당하다.) 당시의 느낌이나 특정 장면만이 떠오를 때가 많다. 영화는 기억의 이러한 특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해 낸다. 여러 개의 거울을 통해 사물을 보면 익숙하던 것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민우(강동원 배우)의 집에 거울이 상당히 많은데, 그 수많은 거울을 통해서 본 민우의 낯선 모습이 바로 은혜(공효진 배우)가 느낀 미미(이연희 배우)를 떠올리는 민우에 대한 느낌일 터. 거울은 현실과 다른 차원(전의식)으로 가게 해주는 매개체로 표현되기도 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직관적으로 표현되는 장면들이 꽤 많다. 가령 미미가 어둠 속에서 나올 때가 많은데, 이는 미미가 전의식 또는 기억 깊숙한 심연에 존재한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혹은 뤼팽바에 갈 때 나선형의 계단을 내려가는데, 이는 전의식으로 들어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미미를 어딘가로 끌고 가려는 존재가 있는데 이는 꼭 미미가 민우의 기억에서 지워지려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전의식에서 완전한 무의식으로. 꼭 <인사이드 아웃>에 나온 결국은 사라진 빙봉처럼.
이 외에도 선풍기 바람에 왜곡되는 편집장의 목소리는 편집장에게 받는 압박감을 묘사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시아버지도 이와 똑같은 레퍼토리로 등장하는데, 이 또한 민우가 받는 압박감을 나타낸다. 은혜와 미미가 지하철역에서 마주치는 장면도 나오는데, 이는 은혜가 미미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끼게 됨을 의미한다. 현실적으로는 은혜와 미미는 만날 수 없으니. (미미는 이미 죽었다.)
영화 후반부에서 민우가 미미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민우는 또다시 뤼팽바에서 미미를 만나게 된다. 민우가 바에 들어서자 이전과는 다르게 바에는 사람이 가득하다. 바텐데의 "때로는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괜찮은 일 아닐까요?"라는 대사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북적이는 바에서 민우는 마침내 미미를 발견한다. 이때 바에 빼곡한 사람들은 또 다른 기억들을 나타내는 것 같고, 이들은 미미에게 집중하자 하나둘씩 자리를 떠난다. 하나의 기억에 집중하면 다른 생각이나 기억들이 안중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민우는 미미랑 대화하다가 찐으로 잠에 든다. 미미를 만난 건 선잠을 잘 때였던 것이다.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은 곧 전의식에서 무의식으로 가는 상태. 미미는 전의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민우가 완전한 잠에 삐지면 만날 수 없다. 하지만 미미는 결국 자신을 쫓아오던 남자와 기차를 타고 민우를 떠나가고 무의식 속으로 사라진다. 마침내 미미가 떠나고 난 후 마지막 씬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에서 끝이 난다. 영화 내내 명도가 낮았던 것과 비교하면 눈이 부실 정도다. 민우를 혼란스럽게 했던 방황이 끝이 난 것이다.
처음 본다면 다소 의아하고 난해하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영화이다. 하지만 비슷한 경험이 있거나, 인물의 감정을 유심히 들어다본다면 그저 자연스럽게 영화가 읽히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첫사랑을 다시끔 회고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