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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 Aug 16. 2024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뷰

무질서의 미학


    요 근래 읽은 책 중에 제일 흥미로웠다. 자연과학의 가면을 쓴 인문학책 같다. 혹은 인문학의 가면을 쓴 자연과학책 같거나.


 저자는 인생의 절벽과 마주한 채 해답을 얻고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를 따라간다.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 같았던 그는 끝내 저자가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사상을 가진 것으로 판명된다. 우생학이라는 사상은 도덕적으로 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큰 결함을 가졌음을 밝혀내고, 우리가 이제껏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어류'라는 종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리고 여기까지의 과정이 마치 소설을 읽듯이 막힘없이 술술 흥미롭게 흘러간다. 자연과학책이지만 반전까지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이 책에서도 결국 자연과 생명은 궁극적으로 경계가 없다고 말한다. (레슬리 마몬 실코의 의식이라는 소설의 주제가 다시금 떠오른다.) 인간들이 편의상 종을 만들고 차이점을 분류하며 경계를 짓고자 했지만, 사실상 그 경계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인위성과 자의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씀으로써 인류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런 사실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분류학자로서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아마도 종들이 그 본성상 변경할 수 없이 확고한 범주가 아니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다윈은 전통적으로 하나의 종으로 여겨온 생물들에게서 너무 많은 다양성을 목격했고, 그 결과 종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확실한 경계선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서서히 지워졌다. 그는 심지어 그중 가장 성스러운 경계선, 그러니까 다른 종끼리는 번식능력이 있는 자손을 만들 수 없다는 가정도 헛소리라는 것을 알아냈다.(67p)"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저자는 발전론적 시간관["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생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신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천천히 째깍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이 더 적합하고, 더 지적이며, 도덕적으로 더 진화된 생명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205p)]에 대해서도 반기를 든다. 세상의 종들은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혼돈스럽고 경계가 없는 세상에 적응하며 변화하는 것뿐이라고. 발전론적 시간관이라는 것은 자연과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무지하고 오만한 인간들의 착각이다.


 어느 종들보다 인간이 우월하다고 믿는 인간중심적 태도도 마찬가지다. 약간은 다른 비유일 수도 있지만, 영화 아바타를 생각해 보자. 숲에 살던 부족이었던 제이크 설리 가족들이 바다로 이주를 하게 된다. 숲에 살기에 적합하도록 진화된 숲 부족은 바다에 적응하기에 어려움을 겪는다. 수영도 제대로 못하고 잠수도 오래 하지 못한다. 이런 제이크 설리 가족들을 열등하다고 생각하며 차별하는 바다 부족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열등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뿐이다. 반대로 바다 부족이 숲에 가서 살게 된다면, 그들의 상황은 역전될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며, 다름의 문제일 뿐이다. 더 적절한 비유를 찾자면,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꼽을 수 있겠다. 2장 <말하는 꽃들의 정원>을 보면 인간중심적 태도를 역전시킨 부분이 있다. ["이 정원에는 너같이 돌아다닐 수 있는 꽃이 하나 더 있어." 장미가 말했다. "난 너희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해. 하지만 그 애가 너보다 더 많이 잎이 우거져 있어." (...) "그러니까, 그 애도 너같이 꼴사납게 생기긴 했어. 너보다 색깔이 더 빨갛고, 꽃잎은 더 짧지, 아마." "꽃잎이 바짝 위로 치켜 올라갔어. 달리아처럼." 참나리가 말했다. "너처럼 헝클어져 있지 않아." "하지만 그건 네 잘못이 아냐."장미가 친절하게 말했다. "넌 시들기 시작했으니까 말이야. 그럴 때 꽃잎이 조금 흐트러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이처럼 꽃이 인간을 꽃의 관점에서 보면 우스꽝스러워지듯이(꽃들이 앨리스를 꽃의 관점에서 판단한다), 인간이 자신의 잣대에서만 세상을 판단하는 것에는 제약이 따른다. 이것이 바로 다양성이 중요한 이유고,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외치는 주제이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226~227p)라는 책의 대목에서도 단편적인 시각을 경계하고 다양성을 중시하는 저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새: 명백히 열등한 존재지만, 곡예 솜씨가 감탄스러움


잠자리: 멀리 떨어져 있는 영혼, 거의 동물 같지 않음(날개가 달린 잔가지)


나무: 식물 중 가장 강한 존재"(257p)


 저자인 룰루 밀러가 비판하고자 써놓은 위의 직관적인 계층 구조는, 앞서 언급했던 거울나라의 앨리스2장 <말하는 꽃들의 정원>에서 꽃들이 앨리스에게 한 말들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262 페이지에 나오는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이다.'라는 문장은, 그야말로 책의 전반을 관통하는 모티프로 보인다. 이 문장 하나로 우리는 체계적으로 보였던 세상이, 그래서 안전하게만 느껴졌던 세상이, 한순간에 혼돈과 무질서의 도가니로 무너져내리는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다. 세상은 혼돈스러우며, 무질서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적과 희망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룰루 밀러는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리기 때문이다.(...) 이 폭풍우는 짜증스럽기만 한 일일까? 어쩌면 그것은 거리를 혼자 차지할 수 있는 기회, 온몸에 빗물을 적셔볼 기회, 다시 시작할 기회일 수도 있다."(263~264p)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 인간들이 물고기를 어류라고 불렀던 까닭은, 그들의 특성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사는 곳에 따라 단편적으로 분류해 버렸기 때문이다. 폐어는 겉보기에는 연어와 더 닮아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소에 더 가까우며, 더 나아가 인간과 더 가깝다. 분류하고자, 경계를 짓고자 한 인간들의 오류였던 것이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해골 열쇠를 하나 얻었다. 이 세계의 규칙들이라는 격자를 부수고 더 거침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물고기 모양의 해골 열쇠.(...) 우리는 또 무엇을 잘못 알고 있을까? 과학자의 딸인 나로서는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긴 했지만,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과학 자체에도 오류가 있음을 깨닫는다."(267p) 과학자들은 늘 자신의 가설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음을 전제한다고 한다. 아니, 기존의 가설을 반박하고자 연구를 한다고 들었다. 책을 읽고 나니 더욱더 과학자로서 경계해야 할 자세가 바로 경직된 사고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레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이 떠올랐다. 패러다임이란 한 시대를 지배하는 과학적 인식, 관습, 가치관 등이 결합된 개념의 집합체이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존재한다면, 그 패러다임의 문제점 해결을 위해 계속 연구를 거듭하는 것을 정상과학이라 부른다. 정상과학이 누적되면 기존의 패러다임은 부정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립되며, 그러다 과학혁명이 발생하게 되면 기존의 패러다임은 사라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기에 과학은 항상 생성. 발전. 쇠퇴. 대체의 과정을 되풀이하게 된다. 우리가 지금 당연시하는 과학적 사실은 과거에 터무니없는 발상이었을지도 모르고, 현재 우리가 확신하지 못하는 과학적 근거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따라가다 보면 세상을 보는 사야가 조금은 더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적어도 나로서는 그랬다. 원래 한번 본 책을 다시 읽는 경우는 드물지만(특히 비소설은 더더욱), 이 책은 다시금 읽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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