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니 Aug 21. 2024

영화 《아바타》 리뷰

레슬리 마몬 실코의 소설 《의식(Ceremony)》과의 비교

    영화 《아바타》를 보게 되면 저절로 미국 인디언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비족이라 불리는 종족이 북아메리카 인디언 종족이라는 나바호족이 연상되었다. 영화에서 나비족은 은유적으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일까, 레슬리 마몬 실코의 《의식(Ceremony)》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비록 영화 후반부로 가면서 선과 악이 평면적으로 묘사되고 스토리도 클리셰를 따라가서 조금 아쉽긴 했지만(액션과 시각적 볼거리에 초점을 둬야 해서 어쩔 수 없었지 않을까-너무 사령관만 빌런의 총대를 메고 가며 무슨 절대 악처럼 묘사되었다.) 영화가 가진 메시지는 인상 깊었다. 그리고 이것을 《의식(Ceremony)》과 비교해보고자 한다.

 영화는 모든 것을 수단으로 생각하고 개별적인 물질로 파악하며, 이익과 욕심을 위해 파괴와 폭력을 서슴지 않는 서구의 태도를 비판한다. 그에 반해 원주민들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상호유기적인 관점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나비족이 가진 그 시냅스가 아닐까 싶다. 모든 것이 시냅스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라도 파괴해 버리면 결국 돌고 돌아 자신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그렇게 여기며 터전을 공유하는 모든 생명체를 아무리 하찮아 보이더라도 존중하며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그들 내부의 질서가 존재하며 이를 어기지 않은 채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다. 하지만 서구가 침략을 해오며 그 내부 질서가 깨져버리고 균형이 깨져버린다.

 여기까지는 《의식》과 견해가 동일하다. 그런데 아바타는 마지막에 결국 sky people과 나비족을 분리하며 끝을 맺게 되며 주인공 제이크도 결국 둘 중 나비족을 "택"한다. 영화 《아바타》에선 행성을 지키는 데 성공하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에 《의식》은 원주민의 침탈의 역사로 인한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과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융합과 변화이다. 퇴보하거나 역사를 거꾸로 돌리지 않는 이상 사회가 변화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잘' 변화하고 '잘' 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변화를 막을 수 없다면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거었다. 기존의 방법만을 고수해서는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다. 쿠쉬라는 주술사가 타요를 치료하는 데에 실패하고 베토니라는 주술사가 타요를 치료하는 데에 성공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쿠쉬는 다만 기존의 의식을 똑같이 되풀이하지만 베토니는 침탈의 역사를 잊지 않으며 그것을 기억하며 주술을 행하기 때문이다.

 《의식》의 본문을 보면 원주민들은 사슴을 사냥할 때에는 꼭 사슴의 눈을 가리고 그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런 후 옥수수 가루를 사슴의 코에 뿌려 그의 영혼을 대접한다. 그래야지 다음에도 사슴이 나타나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일종의 의식인 것이다. (영화 《아바타》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서구의 교육을 받은 록키라는 등장인물은 고기를 따뜻한 방에 두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고기를 따뜻한 방에 두면 상하기 마련이고, 이를 알면서도 의식을 치르느라 고기를 따뜻한 곳에 두는 것은 미련한 짓이며 기존의 방법을 미련하게 고수하는 행동일 거다. 하지만 자신이 이득을 취하는 동물들과 생태계에게 감사한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이 또한 위험한 일이다. 이를 오직 도구로만 보고 나와는 무관한 어떠한 개별적 존재로 인지한다면 이를 남용하게 되고, 결국은 생태계는 탈이 나고 그 해는 언젠가 본인에게 돌아오게 된다. 그러니 서구의 지식과 인디언의 지혜를 서로 융합하여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나쁜 것이나 절대적으로 좋은 것은 없다. 일종의 정반합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